[연재]하동에 스며들다-악양에 스며들다.
[연재]하동에 스며들다-악양에 스며들다.
  • 하동뉴스
  • 승인 2023.10.3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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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면 강향숙 

2011년 2월 도시 생활을 접고 악양으로 내려왔다. 인생에는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는데 40대 이후로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악양’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선 귀농 귀촌을 위하여 교육도 받고 몇 년씩 준비하던 지인들도 선뜻 도시를 뜨진 못하였던지라 빠르게 결정하고 과감하게 이사를 결정한 나를 놀라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친정어머니랑 같이 생활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딱히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땅을 사서 한 달 만에 집을 짓고 내려오니 황무지에 집만 덩그러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악양’ 이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고 하동에 악양이 속해 있는 것도 몰랐으니 악양은 내게 그야말로 낯선 곳이었다. 

“기술센터에 강의 들으러 간다고 하면 주변에선 무슨 공부를 해마다 쉬지 않고 하느냐 했지만 센터에서 배운 교육으로 스마트 스토어, 동영상제작, 사진 편집 등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는 알차고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인터넷 판매망도 구축하고 지원금을 받아 작은 제조시설도 지을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하동군 정보화농업인 활동으로 도지사 표창장까지 받았으니 확실하게 농업인 인증은 받은 셈이다.”

하지만 처음 악양을 방문했을 때부터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그마한 면에 도서관, 우체국, 농협도 있는 게 너무 신기했다. 무엇보다 작은 도서관 책 보따리가 맘에 들었고 작은 아이가 초등학생이라 여기 오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양(岳陽)은 이름 그대로 볕 잘 들고 큰 산에 돌 많은 고장이라 텃밭을 만들기 위해 고구마 캐듯 돌들을 주워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많지 않은 노동에도 며칠에 한 번 씩은 몸살을 하기도 했다. 몸을 쓰며 살아 본 일이 없는 약골인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하루 종일은 못하지만 지금은 예초기로 직접 풀도 베고 매실, 감나무 전지도 직접 하게 되었다. 조금씩 일을 익히며, 한 1년은 쉬어야지 생각했기에 지리산학교 사진반, 목공반, DIY 목공반 등 다양한 수업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고 배우고 익힌 것은 또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기도 했다. 악양은 귀농 귀촌인들도 많고 문화예술인들도 많아 시골 같지 않은 시골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문화생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도 여럿 사귈 수 있었다. 시골에 왔으니 농사도 지어봐야지 하며, 농업기술센터 농업인대학에 등록을 했다. 하동은 매실의 고장이기도 하여 매실대학이라고 불리는 매실재배과정 수업을 들었다. 1주일에 한 번씩 1년의 과정을 마치고 나니 매실에 대한 이해와 실습을 통해 매실 전지, 전정까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사실 매화꽃 열매가 매실이라는 것도 모르던 도시녀였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교육을 함께 했던 이들은 지금도 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 도움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농사에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마운 분들이다. 지금도 농업기술센터에서 다양한 교육을 들으며 공부하고 농업인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함께 했던 이들과 모임도 만들고 같이 조직 활동을 하며 서로 정보도 주고받으며 농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농업은 혼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농사짓고 판매하려면 홍보활동도 할 수 있어야 하고 홈페이지관리, sns활동, 시류에 맞게 다양한 학습활동을 이어가야 해서 늘 공부를 해야 했다. 기술센터에 강의 들으러 간다고 하면 주변에선 무슨 공부를 해마다 쉬지 않고 하느냐 했지만 센터에서 배운 교육으로 스마트 스토어, 동영상제작, 사진 편집 등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는 알차고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인터넷 판매망도 구축하고 지원금을 받아 작은 제조시설도 지을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하동군 정보화농업인 활동으로 도지사 표창장까지 받았으니 확실하게 농업인 인증은 받은 셈이다. 무엇보다 나도 뭔가 지역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작한 성인 문해 교육 강사 활동은 가슴이 찡할 정도로 감동을 주었다.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석에 올려놓은 기초를 닦으신 우리 윗세대는 교육받을 기회에서 소외된 분들이 많았다. 먹고 살기에 바빠 학교는커녕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살아왔기에 본인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과를 마친 저녁에 수업을 하던 문해 교실은 지친 노동에 몸을 뉘여야 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배움에 한이 맺혀 가슴 답답해하시던 어머님들의 초롱초롱한 눈으로 빛나던 배움터였다. 하루 일을 마치자마자, 때로는 저녁도 거르시고 공부하러 달려오시던 가슴 벅찬 학습의 현장이었다. 노동으로 굽어진 거친 손, 떨리던 손으로 한 자 한 자 배워 이름도 쓰고, 주소도 쓰고, 더듬더듬 글을 읽어 내시던 어머님들은 내 시골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하여 초등학력 인정과정을 마친 70~80대 할머니들이 중학과정으로 진학하였고, 나는 7년째 문해 교육과정에 함께 하고 있다. 3년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초등과정 졸업식을 하던 날 “내게도 이런 날이 있구나”라며 눈물지으시던 어머님들과 함께 내 눈가도 촉촉이 젖었다. 힘들게 농사지어 갖다 주시던 상추, 깻잎 모종 등을 보며 어머님들이 일을 줄이셔야 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평생을 땅과 함께 숨 쉬며 땅을 보듬고 사시는 어머님들에게는 농사가 삶의 근본이며 삶의 의지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 덕분에 나는 마을에서 예쁨 받는 사람이 되었고, 쑥스럽게도 도시에서 이사와 농사까지 잘하는 사람으로 칭찬받고 있다. 도시에서 골목길에 혹은 아파트 입구에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보다 등도 굽고 손가락도 휘어졌지만 여기 계신 어르신들이 훨씬 생기 있고 행복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농촌엔 농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지 않으니 기회도 많은 곳이다. 도시의 치열한 경쟁과 비교에 시달리며 사는 것보다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보길 권한다. 생각보다 다양한 일자리와 일거리가 있는 곳이며 조금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은 농업만으로 충분한 수익을 얻지 못하곤 있지만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자력갱생하고 있으니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악양에 온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도시에서 살았으면 많은 돈을 들여 집을 장만해야 하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에 허덕여야 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마당, 빨랫줄에 하얀 햇살을 담고 있는 수건만 보아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여기엔 있다. 처음 동네에서 ‘새댁, 새댁’ 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누구를 저리 부르나 하고 쳐다보니 나를 부르던 것이었다. 40대에 새댁이란 소리를 들으며 예쁨 받을 수 있는 곳, 60대도 청년이지 하는 곳. 정말 좋지 아니한가. 사계절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초록이 저렇게 다양한 색을 띠는구나, 하며 쳐다보는 앞산의 모습도 기쁘다. 소소한 일상도 기쁨으로 빛나는 이곳! 아이들도 앞으로 이곳 악양에 깃들어 살았으면 좋겠다. 글/하동군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84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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