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에 스며들다-10
[연재]하동에 스며들다-10
  • 하동뉴스
  • 승인 2024.01.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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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귀촌은 계획이 아니다.-화개면 김종환

나는 부산 해운대의 작은 학원에 10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이 확대되고, 학원 수강생들도 점점 빠져나가 학원 운영이 어려움에 빠졌다. 아파트 대출금에 아들딸 교육까지 들어가는 돈은 그대로인데 학원 인원수가 줄다 보니 격일제 근무를 하게 되고 수입도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학원수업이 없는 날에는 샷시 시공업체에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며 코로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2020년 장모님께서 화개면에 살고 있던 동생과 같이 살고 싶다고 하셔서 간단히 장모님 짐을 챙겨서 화개면으로 모셔다 드리러 오게 되었다. 하동 IC를 거쳐 화개면으로 들어오는 길은 조용하고 따뜻한 고향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동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꼭 한번은 살아보고 싶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섬진강이 있고, 화개천의 시원한 계곡이 있고, 맑은 공기와 예쁜 녹차 밭, 지리산의 절경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화개장터보다 하동이야말로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장모님을 하동에 모셔다 드린 뒤 한 번씩 하동에 찾아와서 강에서 낚시도 하고 마을 곳곳에 있는 앵두를 따 먹기도 하고 시원한 계곡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즐겁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2021년 6월 어느 날 4년 동안 매매로 내놓았던 아파트가 팔렸다. 해운대가 부동산 투기지역 지정으로 여러 가지 제한이 있었는데 부산 부동산 거래가 침체하여서 규제가 풀렸던 시점이었다.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학원 사정이 더 어려워져서 학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일단 구직급여 신청을 하고 집사람과 의논하여 하동으로 이사하기로 하였다. 아이들도 하동으로 가는 것을 좋아해서 모두 찬성의견으로 2021년 7월 하동으로 이사를 왔다. 다행히 장모님이 살고 계신 중기 마을에 빈집이 딱 한 채 남아있어서 월세로 계약하고 무작정 이사를 왔다. 처음 이사 온 낯선 동네였지만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하셨던 집주인께서 잘 챙겨주셔서 마을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이곳저곳 소풍도 다니고, 주인아저씨와 막걸리를 나눠 먹으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갔다. 도시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냐면서 걱정했다. 

나는 하동에 오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아이들 교육문제도 다년간 학원 강사로 있어서 선생들이 억지로 시키는 공부는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교육문제도 걱정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두 명의 자녀들이 화개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운영 방침이 ‘행복학교’라 놀러 가는 곳도 많고 다양한 방과 후 활동도 있었다. 해운대에서는 어떤 행사라도 돈을 내야 했는데 이곳은 돈 내라는 말이 없었다. 여행도 자주 가는데 집에서 준비해서 보내야 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집 앞까지 통학버스가 태워주고 하교까지 시켜주니 더는 바랄 것이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하동에 이사 오고 몇 개월 후에 집 앞에 농협주유소에서 직원을 구해서 입사 지원 신청을 하고 주위 분들이 산불감시원도 봉급이 괜찮으니 지원해보라고 해서 산불감시원도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한 결과 둘 다 합격해서 출근하라고 했지만, 농협주유소는 부산의 어느 용역회사에서 모집하는 것이라 일단 화개면 지리파악도 하고 사람들도 알아가기 위해서 산불감시원을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화개장터 입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청년창업 칸은 농·특산물 외에 모든 업종이 가능하여 호떡, 어묵, 떡복이, 순대, 국수, 팥빙수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있다.
나도 올해는 상덕에 사시는 형님과 함께 2000평 정도의 감나무 밭을 임대하여 대봉감을 수확하려고 하고 있고,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상덕마을 밭에는 마늘, 양파, 감자, 비트, 하늘마, 고추, 단호박들이 충실하게 자라고 있다.”

2021년 11월에서 2022년 5월까지 산불감시원을 하면서 화개면 산불감시 총무를 맡아서 감시원 형님들과 친분을 쌓았고, 화개면에 속해 있지만 모르고 있던 여러 마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들딸들은 어려서부터 딸은 판소리, 아들은 고법을 배워서 소리북을 쳤는데 2022년 5월 딸이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초등부 대상을 받았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친한 산불감시원 형님께서 이런 일은 여러 곳에 알려야 한다며 친분이 있는 하동신문 기자에게 전화해서 “하동의 미담을 널리 소개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여 하동신문에 크게 실리게 되었다. 다른 감시원분들도 화개장터 입구에 대상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주셨다. 또한, 화개면장님께서도 격려하시며 딸아이에게 용돈도 주셨다. 도시에서는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았던 일을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축하해주고 격려를 해주셨다. 산불감시원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여러 좋으신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초등학교 학부모들과도 친분이 쌓이면서 하동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상덕마을에 살고 있는 학부모께서 “하동에 왔으면 농사를 지어보는 게 좋지 않겠냐”며 여러 가지 도움을 주셨다 2022년 5월 녹차 밭을 임대하여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여 나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농부가 되었다

10시 출근이었던 산불감시원이었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녹차 밭에서 예초기도 돌리고, 풀도 뽑고, 녹차도 수확하였다. 유튜브를 참고해서 프라이팬에 녹차를 덖고 다시 비비고 해서 말도 안 되는 녹차를 만들기도 하였다. 산불감시원 생활이 끝나고 본격적인 농부의 삶이 시작되었다. 집사람이 거금 60만 원을 들여 선물해준 예초기를 등에 메고 녹차 밭을 정리하고, 차 잎을 따기도 했다. 처음이라서 서툴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5명이 모여 영농 조합법인을 설립을 목표로 여러 작물을 재배해 보았다. 물을 끓여 삶으면 국수로 변하는 신기한 호박, 독특한 냄새를 가진 방아도 키우고 돌배 밭을 임대해서 돌배도 수확하고 무, 배추까지 여러 작물을 재배하였다. 처음 하는 농사일이라 허리 굽히는 것도 힘들고 삽질 한 번도 엄청 버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러 명이 모여서 같이 일하니 힘이 나기도 하고 다양한 비법을 배우게 되니 점점 익숙해졌다. 모든 농민이 공감하겠지만 어떤 작물을 재배하든지 재배비용 및 인건비를 거두어들이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타산이 나오지 않아 힘들게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5명이 개인 일들을 포기하고 모여서 같이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야심차게 시작되었던 영농조합의 꿈은 돌배 수확을 끝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다시 9월이 되니 산불감시원 모집공고가 떴다. 농사만으로 가계운영을 할 수 있다면 농사를 지으려고 했겠지만 아직은 농사만으로는 살기 어려워 다시 산불감시원에 지원하였다. 필기시험도 치고, 실기시험도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유는 건강보험료가 많이 나와서 중위소득 70% 이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년 동안 늘어난 재산도 없고 작년에는 합격이었는데 올해는 안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이외에도 작년에 같이 활동했던 형님들도 재산 때문에 불합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따져보니 가족 수에 따라서 중위소득 70% 에 해당되면 건강보험료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사무소 산업계에 건의하여 어렵게 산불감시원에 다시 합격하게 되었다. 2022년 10월 우리 딸이 심청가 완창 발표회를 계획하였는데 화개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하동 교육지원청에서 지원금이 나와 화개면사무소 앞에 있는 다향문화센터에서 2시간이 넘는 심청가 완창 발표회를 하게 되었다. 오빠는 동생 북을 쳐주면서 고법발표회를 겸하게 되었다. 부산 국립국악원 성악단이신 선생님께서 직접 오셔서 사회를 봐주셨고, 실수는 많이 있었지만, 무사히 완창무대를 마치게 되었다. 판소리에서 완창이라는 것은 선생님께 한바탕을 모두 전수 받았다는 의미이고, 모든 소리꾼의 도전이기도 하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아름다운 화개에서 첫 단추를 잘 끼워 넣은 것 같아서 흐뭇했다. 2022년 11월 7일 산불감시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총무를 맡아서 반장님을 도와서 감시활동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소각도 많았고, 주택 화재도 몇 번 발생하였다. 특히 2023년 3월 11일 오후 1시 30분경 의신주차장 앞에서 시작된 지리산 산불은 산불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게 되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처음 무전을 받고 화재현장에 도착하였을 때 발화지점에서 50m 인근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벌써 소방차는 출동하여 초동진화를 하고 있었지만, 불길은 나무 사이로 급속히 치솟아 올라갔다. 감시원들은 등짐펌프, 갈고리를 들고 불길로 들어갔다. 하지만 등짐펌프로 잡히는 불길이 아니었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잔불 정리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소방헬기도 출동하고, 진화대원들도 출동하고, 의신주차장에 상황실도 마련되었다. 밤이 되어 감시원들이 불을 끌 수 없는 상황이라 퇴근 후 아침 일찍 다시 출근하기로 하고 상황은 정리되었다. 다음날 하동군에서 거의 모든 공무원이 총출동하여 산불 진화에 투입되었다. 우리는 지리산 중턱에 있는 원통 암까지 진화 선을 구축하여 상황을 지켜보던 중 반가운 비가 내렸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반가운 마음에 손뼉을 쳤고, 고함을 질렀다.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지는 않았지만, 큰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잔불 정리를 하였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2023년 3월 우리 마을 대동회에서 새로운 이장선거가 있었다. 그전에 마을 어르신께서 나에게 “젊은 사람이 이장을 해서 새롭게 마을을 바꾸어 보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을에 들어온 지 2년도 안 된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 너무나 고마워 “열심히 해 보겠다” 고 했다. 이장선거는 나를 포함해 2명이 입후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결과 5표 차이로 이장선거에서 낙선하게 되었다. 

사실 아직 마을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였고, 의욕만으로 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선출되신 이장님에게 투표했다. 마을 분들이 아쉽게 이장에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새마을지도자로서 경험을 쌓아 다시 도전하라고 말씀하셔서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 후에 마을개발위원으로 등록되었고, 화개면 새마을 협의회 모임에서 총무를 하라고 해서 산불감시원도 총무, 새마을 협의회에서도 총무를 맡게 되었다. 새마을지도자로서 마을 수도요금을 총괄하고, 화개면 국토 대청소 등 바쁜 와중에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하게 되었다. 아내는 2022년 군의원 선거에서 후보자 회계담당자로 2개월 정도 일했고, 후보자님께서 당당히 군의원 재선에 성공하였다. 또한, 하동군 홈페이지에서 화개장터 장옥 입주자 모집을 보던 중 농.특산물과 먹거리는 아직 3년이 지나지 않아 해당 사항이 없고 나머지도 희망이 없었는데, 청년창업 4칸을 보니 만 45세로 되어있었다. 다행히 아내 나이가 만 45세라서 입점신청을 하여 당첨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화개장터 입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청년창업 칸은 농.특산물 외에 모든 업종이 가능하여 호떡, 어묵, 떡복이, 순대, 국수, 팥빙수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있다. 나도 올해는 상덕에 사시는 형님과 함께 2000평 정도의 감나무 밭을 임대하여 대봉 감을 수확하려고 하고 있고,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상덕마을 밭에는 마늘, 양파, 감자, 비트, 하늘마, 고추, 단호박들이 충실하게 자라고 있다. 

형님께서 ‘지리산 섬진강 사람들’이라는 사업자 등록증을 가지고 계시는데 내가 블로그를 제작하고 유튜브 영상을 올려 홍보할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다. 하동에 온 지 2년도 되지 않아 너무 많은 일이 생겨나도 실감이 잘나지 않는다. 어떤 분들은 화개에서 20년 거주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고 놀라는 분들도 있다. 산불감시원분들과의 교류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녹차 티백 작업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학부모로서도 만나고, 집사람이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많은 분을 만났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부산에는 학원에만 있으니 종일 전화 한, 두통이 전부였는데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나를 찾는 전화가 온다. 젊은 나이는 아닌데 여기서는 젊은 사람에 속하게 되어, 왠지 새로운 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하동은 나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수없이 많은 친절한 사람, 새로운 직업, 아름다운 풍경, 맑은 공기, 화개장터의 활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쁜 선물들이었다. 조금 더 빨리 하동으로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귀농, 귀촌이란 말조차 몰랐던 내가 2년 동안 지역 사람들과 융화되어 어느새 ‘화개사람’이 되었다. 어디에서든지 삼촌, 숙모, 어머니, 어르신, 형님, 형수님들이 계시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저녁 약속이 잡혀있다. 평생 처음 하는 농사일로 몸은 힘들지만, 미래에 언젠가는 훌륭한 농부이자 존경받는 마을의 어르신이 되어있는 나를 꿈꾸게 된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계획하고 계산하지 말고 무작정 여행 오듯이 오시면 무엇이든 해결된다. 계획하고 설계하다가 시간만 허비하고, 하루하루 나이만 늘어가니 늦은 나이에 오게 되면 계획하고 설계한 모든 것들이 헛된 꿈이 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실천하는 것이 귀농, 귀촌의 가장 올바른 계획이자 설계일 것이다.” 오늘도 바쁜 농촌의 하루가 간다. 글/하동군 제공 정리/김선규 통신원 하동뉴스 hadongnews84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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