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뉴스가 권하는 책--진실한 용기는 사랑에서 우러난다 
[연재]하동뉴스가 권하는 책--진실한 용기는 사랑에서 우러난다 
  • 하동뉴스
  • 승인 2020.12.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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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3장 경솔하면 곧장 뿌리를 잃는다


-진실한 용기는 사랑에서 우러난다(舍慈且勇 사자차용이라)

舍慈且勇(사자차용)
舍儉且廣(사검차광)
舍後且先(사후차선)
死矣(사의)

사랑함을 버리고서 용맹하고 검소함을 버리고서 마구 써대거나 뒤서기를 버리면서 앞서기하면 죽는 것이다.<노자 67장 참조>

새끼를 숨겨두고 사냥을 나갔던 표범이 돌아와 보니 새끼가 온데간데없고 큰 뱀이 어슬렁거리며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미 표범은 새끼가 저 뱀의 배 속에 있음을 직감하고 뱀을 가로막고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뱀은 큰 먹이를 삼킨 탓으로 몸놀림이 민첩하지 못해 날쌘 표범의 사나운 이빨을 당할 수 없었다. 뱀의 목을 물어뜯어 죽인 다음 뱀의 배통을 찢어서 삼켜진 제 새끼를 끄집어냈지만 이미 새끼는 질식사하고 말았다. 죽은 새끼를 혓바닥으로 핥아주었지만 표범의 새끼는 영영 살아나지 못했다. 표범의 새끼를 먹이로 삼았다가 죽임을 당한 뱀의 주검 옆 죽은 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미 표범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나는 장면을 TV다큐멘터리에서 보았다. 이런 어미 표범이야말로 사랑으로 용감한 참모습이다. 사랑으로부터 우러나는 용기가 진실한 용기임을 밝힌 말씀이 ‘사자차용’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검소하다. 사람만이 꾸미고 다듬고 허세를 부려 돋보이게 하고자 꼼수마저도 마다하지 않을 뿐이다. 공작새의 깃털을 두고 공작새는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다. 공작새는 자연이 준 화려한 깃털 옷 한 벌로 평생을 만족하는 까닭이다. 호랑이나 표범은 화려한 무늬 탓으로 사냥감이 된다. 호표의 털가죽 옷을 사람이 입고 사치를 부릴 뿐이지 호표에게 화려한 털 무늬의 가죽은 자연이 준 한 벌의 옷일 뿐이다. 호랑이나 사자나 표범 등은 제 배만 채우면 만족한다. 인간만이 항상 게걸스럽게 구는 탓으로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자연에는 쓰레기란 없다. 자연이 쓰레기를 내지 않음은 자연은 검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은 인색하지 않다. 수많은 목숨들이 살아가는 것은 자연이 남김없이 천사를 주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를 천사라 한다. 인간만이 자연이 주는 천사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어진 식재료를 요리조리 꾸며서 맛깔스럽게 먹자고 요란을 떤다. 인간은 호사하고자 낭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삶은 검소함을 저버리고 흥청망청하는지라 그 앞날이 밝지 못하다. 검소함을 저버리고 흥청망청하지 말라는 말씀이 ‘사겸차광’이다.

삶이란 치열한 경쟁인가? 서슴없이 그렇다는 양상이 날로 더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경쟁사회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경쟁사회라고 친다면 인생은 어쩔 수 없이 경기장에서 ‘스포츠’하는 꼴이 되게 마련이다. 삶을 숭배로 따져 승자와 패자로 양분해야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순간 바로 지옥이 되고 만다. 부의 축적을 따져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겠다는 세태가 도도할수록 마음 편한 인생은 아지랑이처럼 되고 만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인생을 경기처럼 여기는 세상이 곧 지옥이다. 경기에는 승패가 갈리고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등등으로 서열을 매겨 승자는 환호하고 패자는 좌절한다. 만약 이처럼 명암이 갈리는 꼴로 몰아간다면 이 세상이 곧 지옥이다. 남은 밀쳐내고 내가 앞서겠다니 남도 나를 밀쳐내고 앞서겠다고 다그칠 터, 결국에는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물귀신 노릇한 셈이다. 뱁새는 뱁새걸음으로 걸어가고 황새는 황새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삶의 자연이다. 뒤로 하기를 한사코 마다하고 마냥 앞서기만을 차지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점점 수렁에 빠져들고 마는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이 사후차선이다. 6·25 전란 때 포성이 울리는 전선에서도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는 어머니가 있었고, 자기는 기운 내복을 입으면서도 쌀가마니를 고아원 문 앞에 두고 간 사람이 있었으며, 구호물자를 받는 줄서기에서 할머니를 앞서게 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선 젊은 사람도 있었으니 이 살벌한 지금 세상을 뉘우치고 언젠가는 인생은 승패의 경기장이 아님을 깨우칠 터이다.   

-반드시 거두어들이는 본래의 도(執古之道 집고지도라)

執古之道(집고지도)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能知古始(능지고시)
是謂道紀(시위도기)

태초의 도를 지키고 그리하여 지금의 만물을 다스리면 태초의 시원을 알 수 있다. 이를 도기라 한다. <노자14장 참조>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것이면 생긴 것이다.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그 무엇에 의하여 태어난 것이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럼 내 부모는 누가 낳아주었는가? 내 조부모가 내 부모를 낳았다. 그럼 내 조부모는 누가 낳아주었는가? 내 증조부모가 낳아주었다. 그럼 증조부모는 누가 낳았는가? 이렇게 묻다 보면 결국 조상이 낳아주었다고 하게 된다. 그렇다고 대답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 조상은 누가 낳았다는 말인가? 천이 낳았다고도 하고 신이 낳았다고도 하며 도가 낳았다고도 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 삼라만상은 도에서 나오고 그 도로 되돌아간다고 밝혀놓았다. 그럼 그 도는 무엇이 낳았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도란 생긴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 장자’에 ‘살생자불사’이라는 말이 나온다.

산 것을 죽이는 것은 죽지 않고 산 것을 낳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상도를 풀이한 말이다. 만물의 생사는 상도의 조화이다. 모든 목숨은 영영 살고 싶어 하지만 반드시 그 삶은 그치고 만다. 상도는 낳아 내보내되 반드시 거두어들인다. 이처럼 상도는 무엇 하나 저버리는 법이 없다. 이런 연유로 ‘만물일부’라 하는 것이다. 만물은 한 곳간에 하나로 있다는 것이다. 귀천이 없고 고하도 없다. 이처럼 만물을 하나이게 하는 것이 곧 본래부터 있는 도 즉 고지도이다. 여기서 고지도란 곧 상도를 말한다. 이러한 고지도를 터득해 지켜서 지금 있는 것들을 다스리면 만물의 시원을 알 수 있다. 천지 산하도 상도가 낸 것이고 초목금수도 상도가 낸 것이고 온갖 곤충-어류도 상도가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 하나같은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도가 곧 만물의 시원이니 유일한 조종이 된다. 상도를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고 상상해도 된다. 사과나무는 여러 가지가 뻗어 있다. 가지마다 봄여름가을 내내 열심히 꽃을 피우고 벌 나비를 불러들여 암수의 꽃가루가 서로 만나서 열매를 맺도록 한시도 쉬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지마다 주렁주렁 사과가 열린다. 가지에 매달린 사과처럼 상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이다. 그래서 상도를 ‘노자’는 천망이라 비유하고 ‘장자’는 일부라 비유하고 두보는 조롱이라 비유한 것이다. 상도를 천망으로 비유하니 당연히 도기라는 말씀이 된다. 그물의 수많은 그물코들은 하나의 벼리로 연이어져 있다. 상도는 그 천망의 벼리를 잡고 있는 조물주인 셈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그 천망 안에서 저마다 단 한 번만의 생사를 누리되 작으나 크나 그 천망을 새어 나오는 것이란 없다. 생사란 단 한 번뿐이다. 오로지 만물은 그 무엇이든 일생일사의 것이다. 흐르는 냇물에서 같은 물로 발을 두 번 씻을 수 없듯이 순간순간이 오로지 한 번만 오고간다. 일조광 년 떨어져 있는 별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은 일조광 년 전의 것을 보는 것이니 지금은 그 별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다가 없어진 별이 상도가 낳은 것인지라 생사의 원둘레 길을 단 한 번만 돌아간 것임을 안다면 그 별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노릇이다. 이를 ‘지고시’라 한다. 고시 고시가 다르고 민들레의 고시가 다르다고 말할 것 없음이다. 인간이든 토끼든 민들레든 나아가 모래알이든 이것들은 모두 있음의 것들이다. 있는 것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하나의 벼리에 매달린 그물코인 셈이니 만물은 모두 하나 같이 그 시원이 상도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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