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도반(道伴)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도반(道伴)
  • 하동뉴스
  • 승인 2021.05.2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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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道伴)


                                     이상국

비는 오다 그치고
가을이 나그네처럼 지나간다.

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에게서 문자도 한 통 없는 날
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준다.

양파 접시 옆에 묵은 춘장을 앉혀놓고
저나 나나 이만한 게 어디냐고
무덤덤하게 마주 앉는다.

사랑하는 것들은 멀리 있고
밥보다는 짜장면에 끌리는 날

그래도 나에게는 내가 있어
동네 중국집 데리고 가
짜장면을 시켜준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2021)

【시인 소개】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동해별곡』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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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을 너무 홀대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겸손하게 보이려고 남들 앞에서 주저앉혔고, 치열하게 살겠다고 끝없이 학대했고, 성공해보겠다고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았습니다. 결코 겸손하지도 못했고, 치열하지도 못했고, 성공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한테서 문자도 한통 없는 요즘은 하루가 여삼추, 안전 안내 문자도 반가울 만큼 적막합니다. 
오늘은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나를 데리고 가까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 시켜줍니다. 양파 접시 옆에 춘장을 앉혀놓고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고, 삐친 나를 다독거립니다. 친구도 바쁘고, 가족도 바쁘고, 강아지도 바쁘고, 가랑비도 바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도는 지구도 바쁘고, 나하고 놀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같이 늙어가는 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늘은 특별히 군만두 하나 추가해서 나에게 소주 한잔 따라줍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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