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악의 평범성 3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악의 평범성 3
  • 하동뉴스
  • 승인 2021.06.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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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3
                                           이산하


몇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2021)

【시인 소개】
이산하 / 1960년 경북 영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로 등단. 시집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악의 평범성』 등이 있음. 2021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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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은 시국 사범으로 수배 중이던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논쟁적인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모진 고문 끝에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석방 이후 오랜 기간 절필한 채 지내다가 몇 해 전에야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쓴 4줄짜리 추모시는 그의 백열한 시정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나를 찍어라./그럼 난/네 도끼날에/향기를 묻혀주마.”(「나무」 전문)
저더러 올해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시집 중 문제적인 시집 다섯 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이 시집  『악의 평범성』을 포함시킬 것입니다. 그만큼 이 시집도 이 시인도 문제적입니다. 이 시집은 22년 만에 내는 그의 세 번째 시집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성실한 나치 장교 아이히만이 왜 무시무시한 유대인 학살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렀는가를 분석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개념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조차 깨어서 성찰하지 않으면 거악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람’은 못될지언정 ‘괴물’은 되지 말자는 이 절규는 그래서 무겁고도 무섭습니다.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시인도 아픔을 달래주는 시인도 소중하지만, 불의에 저항하며 무엇이 진정 고귀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이름은 숭고합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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