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이현상(李鉉相)은 산채로 잡아라!
[노년의 고동소리] 이현상(李鉉相)은 산채로 잡아라!
  • 하동뉴스
  • 승인 2019.08.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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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빨찌산의 상징적 인물 이현상은 본관이 전주, 충청남도 금산 출신으로, 아버지는 면장을 지낸 이면배(李勉培)였다. 이면배는 4백섬지기 부농으로 덕망이 있어, 대전 충정로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 질 만큼 베품이 많았다.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나와 1925년 20세 때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광복 직후 미군정 시절 한반도 최초의 합법정당이던 조선공산당의 당수 박헌영 아래, 조직부장으로 20대 초반부터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현상은 1948년 6·25 전쟁 이전부터 지리산에 들어가, 조선유격대 남부군사령관이 되어, 지리산 주변에서 극열한 빨찌산 준동(蠢動)으로 대한민국의 안정을 크게 위협하였다. 그는 6·25 전란 중에 중국 모택동의 전술을 본 딴 산악 유격전을 펼쳐, 결국 전방의 정규군 3개 사단을 지리산으로 유인하는데 성공, 정규전의 전선을 약화시켜, 개성부터 옹진까지의 3·8선 남부지방을 공산화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 되고,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 할 때, 지리산의 이현상도 박헌영 일파로 몰아 숙청하려 했다. 그 해 9월 18일, 낌새를 눈치 챈 이현상이 김일성의 마수를 피해 백기를 들고 산을 빠져 나오려 길을 나섰다. 화개 빗점골에 이르러 매복했던 국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현상은 따르던 심복들과 몰살당해 목숨을 잃었다. 나이 48세,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친 것이다.

 그들 일행을 총격을 가한 국군은 이현상이 죽은 줄을 몰랐다. 정황을 살핀 경찰이 거짓 공격을 감행, 현장을 살펴 비로소 이현상의 주검을 확인 했다. 경찰을 손 안대고 공짜로 이현상 시신을 차지, 즉시 대통령 이승만에게, ‘이현상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이현상은 죽이질 말고 산채로 잡아라”고 말해 왔던 이승만은, 서울까지 운구 된 이현상을 “죽은 이현상은 보기 싫다”며, 시신을 화개로 돌려보냈다. 이현상을 잡은 전과를 두고, 군과 경찰이 법정에까지 가서 다투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시신을 갖고 있는 쪽의 전과로 하라”고 명령하니, 경찰 측은 특진 잔치가 벌어졌고, 이현상의 시신은 화장 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이현상은 생애 48년 가운네, 철이 든 18세부터 쳐서 30년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비롯한 공산주의 운동에 몰두하다가, 12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6·25전란 전후 8년을 지리산에서 보냈으니, 나머지 겨우 9년 동안이 학생시절과 사회주의 지하운동 기간이었다. 숨을 멈춘 그의 품속에서 발견된 수첩에 한수의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智異風雲嘗鴻動 지리산에 풍운 일고 기러기 떼 움직이네

伏劒千里南走越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 달려 왔으니,

一念何時非祖國 뜻은 언제나 조국 걱정하지 않은 적 없어.

胸有萬甲心有血 갑옷 덮힌 가슴 속엔 피가 솟구치네.  ㈔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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