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 스토리텔링
[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 스토리텔링
  • 하동뉴스
  • 승인 2022.09.06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칭 천자 주민들에게 벼슬 주고, ‘잡혀죽었다’ ‘살아남았다’ 의견이 분분한데….

[황주역, 경자년의 난]이청련의 <청학동결>에 청학동에서 성씨가 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에 이(李)씨 류(柳)씨 황(黃)씨 정(鄭)씨가 먼저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 비기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이곳 청학동 사람들을 그야말로 ‘꼬셔버린’ 스스로를 ‘천자’라고 선언해 버린 간 큰 기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주역’이고, 성은 청학동에서 먼저 복을 받는다는 이(李)씨 류(柳)씨 황(黃)씨 정(鄭)씨 중에 황 씨였다. 황주역, 이 빛나는 이름이 아직도 이곳에 울려 퍼지고 있다. 구한 말 황현 선생이 실화를 쓴 <매천야록>에 황주역은 등장한다. 황주역은 괴짜 내지 기인이었던 모양이다. 약 120년 전, 이곳 청학동엔 ‘진주암’이 있었고, 이곳 주위를 진주암이라고 불렀다. 이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생긴 것도 그럴 듯 했고, 언변은 놀라웠으며, 각종 <청학동결>이니 <정감록>을 두루 꿰고 있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아니면 지나친 신념의 사나이였는지. 그의 손바닥엔 새겼는지, 원래 있었는지, 임금 왕(王)자가 너무도 선명하게 나 있었다. 진주암에서 그는 “이것은 왕의 징표다. 이 난세에 나는 하늘의 아들이며, 내가 천자다”고 선언했다. 손바닥의 왕(王)자 징표는 이 순진한 산골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황주역은 몰려든 마을 사람 중에 사람을 뽑아, 정승과 판서, 각 부서의 장을 정하고, 거사까지 준비했다. 거사, 즉 이씨 조선을 뒤엎고 반란의 날을 ‘경자년’으로 잡았다.  ‘천지개벽을 위한 선인이 드디어 납셨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해, 청암과 화개와 악양에 이어, 하동, 진주까지 이어진다. 결국 이들은 난을 일으켜보지도 못하고, 발각돼 진주부의 관원에 의해 ‘반역도당’이란 이름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 촌 골짜기에서 무려 7명이 서울로 압송되고, 우두머리 김태웅은 참수됐다. 여기서 잠깐, 황주역이 자칭천자이고 우두머리인데, <매천야록>에선 김태웅이 참수됐다고 적고 있어 약간의 혼란을 일으킨다. 이곳 사람들은 김태웅은 황주역이 임명한 정승이었기 때문에 잡혀가고, 황주역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청학동 주차장 아래 계곡이 있는데, 황주역의 아버지 묘는 지금도 틀림없이 남아있다. 자칭 천자든 천손이든, 이곳에는 이미 왕의 기운이 깃돌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 아닐까 한다. 황주역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어필했는지 그는 어쩌면 이적을 행하거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지 않나 싶다.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정동’이 200개의 석축을 쌓고 나라를 얻겠다?

[청학동 정걸방의 난] 정걸방 전설도 있다. 120년 전 황주역의 ‘경자년의 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 뒤 사라지고 그는 전설이 돼 버렸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인물이 40년 뒤에 다시 나타나니, 그의 이름은 정동이다. 역시 청학동에서 먼저 복을 받는다는 4개의 성씨 중 정(鄭)씨다. 정동은 진해 사람이다. 정동은 40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그는 오쟁이(망태기 같은 것)를 지고 밥을 얻어먹고 다니면서, 지리산 주위에 돌담을 무려 200군데나 넘게 쌓았다. 삼신봉 정상의 그 멋들어진 석축도 그가 쌓은 거다. 위험한 낭떠러지 등에 정교하게 쌓아, ‘황주역의 화신’이란 별명까지 있었던 그다. 서울까지 축지법을 써 하룻밤 새에 다녀오기도 한 도인으로 청학동 일대에선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정동은 사라진 황주역의 부활일까. 그의 행적은 황주역과 너무도 비슷하다. 정동은 자신을 칭하기를 “나는 걸방이다”고 했는데, 걸방이란 뜻은 ‘나라를 얻겠다’ ‘나라를 얻는 거렁뱅이’라는 뜻이었다. 정동이 활동했던 때는 1930년대로 추정되고, 그때는 일제강점기 때였다. ‘나라를 얻겠다’고 했지만 ‘구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는지, 추정할 뿐이다.

-다음 류 씨가 난을 일으키나? =정씨와 황 씨가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했으니, 다음은 반드시 류(柳)씨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류 씨는 멀리해야할 성씨일까. 가까이 해야 할 성 씨일까. 만약에 난이 성공한다면…’ 이 씨는 조선을 지배한 왕의 가문이므로 반란을 일으킬 염려는 적고, 먼저 복을 받는다는 성 씨 중 2개의 성이 먼저 난을 일으켰으니, 남은 성씨는 유 씨이기 때문이다.

◆명주꾸리 세 개가 들어가는 깊은 웅덩이 악양 개치까지 연결돼 있단다

[용소] 청학동에 용소가 있다. 용소란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깊이 파여진 웅덩이다. 미륵골과 박단골 가는골 터골 등 네 골짜기의 물이 합수해 만들어진 웅덩이다. 주위의 바위가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져 있다. 옛날에 명주꾸리 3개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용이 살면서 지하굴로 악양면 개치마을까지 왔다 갔다 했다고 해 용소라 했다. 주위에는 어거정 농바위 난바위 열쇠바위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달이 서식한다고 한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령한 땅, 민족의 ‘소도’는 끝내 복원됐다

[삼성궁]삼성궁은 고조선 시대의 소도(蘇塗)를 복원한 곳이다. 소도란 삼한 시대 때부터 천신(天神)께 제사를 지내던 성지를 말한다. 쉽게 말해 삼성궁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소도는 신성한 지역이므로, 국법이 미치지 못해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하면 도망자를 잡아가거나 돌려보낼 수 없는 지역으로 국사 책 등에서 소개돼 있다. ‘배달성전을 세우고, 옛 소도를 복원해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실현하는 민족 대화합의 장을 만들기 위한 것’. 그리고 ‘민족 성전을 건립해 민족정신을 교육하는 곳’이 건립의 큰 뜻이었다고 한다. 삼성궁에는 그래서, 배달민족의 시조인 3명의 신을 모시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역대 나라를 세운 태조들과, 각 성씨의 시조, 현인과 무장들의 위패까지 모시고 있다. 특히 환인, 환웅, 환검(단군왕검)을 모신 궁전으로, 환인은 ‘하늘’ 환웅은 ‘땅’ 환검은 ‘사람’을 뜻한다. 환검은 신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고 배달민족의 시조다. 환검이란 이름 속엔 지금 그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란 이름의 우리민족을 담고 있다. 환검을 폭넓게 해석하면 지금 ‘내 자신’이기도 하다. 조상과 신, 그리고 혁명적이게도 환검이란 이름으로, 성 씨를 만든 시조까지 추앙하는 ‘내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이기도 하다. 삼성궁은 단군교를 믿는 도교 집단이 만든 성지이자, 수행처다. 삼성궁에 있는 사람들은 선도(禪道)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고 있다.

삼성궁의 시작은 현 삼성궁의 교주인 한풀선사의 조부가 하동군 옥종면에서 살다가 1970년 청학동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본격적인 삼성궁의 건립은 교주 한풀선사가 시작했다. 한풀선사는 단군교 신앙을 받아오면서 성장했고, 이곳에 부지를 매입하고 20대 젊은 나이인 1983년부터 33만㎡의 땅에 역시 30여명의 젊은 제자들과 삼성사란 사당을 짓고, 돌을 쌓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장대한 역사를 이뤘다. 초기엔 수행처였지만 90년 이후부터 관광지로 변했다. 이 삼성궁은 1911년에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역사서 <한단고기>등에 나타난 단군을 비롯, 각 건국 시조와 각 성씨의 조상들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한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한 권으로 묶은 역사서다. 환인, 환웅, 단군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삼성기(三聖記)>, 1대 단군인 왕검을 시작으로 47대 ‘단군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주요 사건을 엮은 <단군세기>, 고구려 제왕들의 역사 등이 담긴 <북부여기>, 원시국가 때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과, 민족의 종교와 철학, 한글과 빼다 박듯 닮은 가림토문자, 천부경',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을 싣고 있는 <태백일사> 등 4권을 묶은 책이다. <환단고기>는 일제강점기를 피해, 1980년 공개됐고, 출간과 동시에 그 구체적인 내용 등으로 한국사에 대단한 충격을 안겨줬다. 이 삼성궁은 단군이 곰과 호랑이가 마늘 먹고 환생한 신화의 나라가 아니라, 실재했던 역사임을 말한다. ‘단군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라’는 ‘역사 바로알기’와 ‘민족 자존감 회복의 의미’가 크다. 또 천손사상이 있는데, 우리의 조상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다는 사상으로, 하늘의 자식이라는 중국의 황제 ‘천자’보다 높다는 우월의식을 드러낸 사상이기도 하다. 신이 낳은 자식이 중국이란 나라라면, 우리는 하늘에서 바로 내려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바로 ‘신이다’는 논리다. 삼성궁은 이곳을 개척하기 시작한 한풀선사가 단연 중심이다. 어려서 낙천선사에게 출가해, 선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의 스승에게 삼일신고 등의 단군교 교육을 받고, 선무와 본국검 등을 사사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스승의 유지에 따라 갑자년 1984년부터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선도문화의 유풍에 따라 이런 건축물을 지을 작심을 했다고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돌탑과 돌벽 등이 기계의 도움 없이 그와 그의 제자들이 낫과 괭이 삽 등 기본적인 도구로만 쌓아올린 건축물이다. 대단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건물 중 ‘건국전’는 환인 한웅 단군을 모신 성전이고, ‘무예청’은 무예를 연마하는 공간이다. 청학루는 건국전 위에 있는 건물로, 전망대 역할을 한다. 솟대 1000여개가 있는데 이것은 소도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맷돌은 민초들을 의미하고, 민족정기를 말한다. 절 할 곳이 있으면 절을 하고, 머물고 싶은 곳이 있으면 머물면 된다.  이 삼성궁은 선도의 수련장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은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고, <삼일신고>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수행을 시작한다. 삼일신고는 단군이 ‘얼과 참 이치’ 등 다섯 가지를 단군 자손에게 가르친 말씀이다.
이어 4시~6시까지 도방에 모여 삼법수행이라고 하는 수행에 들어간다. 아침에 선식을 먹고, 활을 쏘거나 검 수련을 하기도 한다. 또 민요와 창을 위주로 노래를 하고, 선무란 춤을 익히기도 한다. 검법, 국궁 등을 수련하고, 택견, 본국검법 등을 배운다. 오후에는 솟대를 세우거나 밭을 일구고, 저녁에는 법문을 공부한다. 한풀선사와 수행자들이 이곳이 소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쌓고 있는 솟대는 무려 1000개가 넘는다. 한반도와 만주를 상징하여 조성한 연못, 한낮에도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토굴, 전시관, 전통찻집 ‘아사달’, 천궁, 숙소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맷돌·절구통·다듬잇돌 등으로 꾸며진 길과 담장 등으로 가꾸어져 있다. 이곳은 신의 제전이므로, 굉장히 신성시하고 신성시 된다.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관광을 하려는 탐방객이 궁 입구에 있는 징을 3번치고 기다리면 수행자가 나와 맞이하고, 고구려식 도복으로 갈아입어야 안내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아 이런 의식은 생략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가을에 개방하다 지금은 사시사철 개방한다. 삼성궁은 전설의 청학동이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