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 하동뉴스
  • 승인 2022.11.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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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문화 관광스토리텔링④-하동포구 80리

[시놉시스] 서정의 강, 강바닥을 뒹구는 작은 돌멩이, 흰 모래알마저도 나와 연관이 있는 강, 그래서 섬진강은 사람들의 뿌리에 닿아있는 강이라 부른다. 많은 시인들이 섬진강을 노래했다. 수많은 발길들이 한밤에도 섬진강을 찾아 헤매었다. 대한민국 국민 80%가 ‘내 마음 속의 고향’으로 섬진강을 떠올린다고 했던가.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섬진강을 맘에 담아 두었을 것이다. 섬진강은 먼저 사람들의 강이었다.

‘대숲을 헤치고 강을 가로질러 어느 때는 동학 혁명군이 건너오고, 어느 때는 쫓기는 자들이 건너갔다.’ 강가의 지금도 남아있는 대나무들은 ‘어느 때는 성난 농민들의 죽창이 되고, 어느 때는 아이들의 손에 들린 도롱태가 되고, 재첩 잡는 아낙의 체소쿠리가 되고, 선비의 붓이 되고, 악공의 피리가 되었다.’ 섬진강을 보는 깊은 애정이 없고서야 어찌 이런 글이 남을까. 토지문학관 최영욱 관장의 글은 ‘아~’하고, 강을 강이 아닌 역사로, 마음으로 가져와 버렸다.

섬진강, 그리고 포구엔 갖은 이야기와 추억이 있었지만 포구는 사라지고, 사람이 떠나면서, 포구는 잊혀지는 듯 했다. 하동포구 80리…. 강 건너편 광양 쪽은 하동 쪽보다 물살이 세고 지형이 험했던가. 물을 따라 배가 드나들기 좋았던 나루터들은 섬진강 뱃길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육로와 잘 연결돼 상행선이 다니는 큰 포구로 자연스레 발달할 수 있었다. 많은 흔적들이 사라졌지만 다행히 수 년 전부터 하동포구, 송림, 평사리 등 강변 공원들이 다시 들추어지고 살아나는 듯 했다. 사람이 가고, 떠나고 싶던 곳 하동포구, 배들이 강물과 어울려 멈췄던 금남포구와 금남, 금성포구, 신방, 중국의 상선과 탐라 울릉의 행상선까지 모였던 화개나루터까지, 섬진강은 포구와 포구로 이어지고 포구와 함께 이별을 하고 사랑을 하고 눈물을 흘렸음이다. 포구마다 아픈 사랑이 남아, 마치 이별의 정거장이랄까. 유독 처녀의 아픈 사랑이 남아 노래로 불려 졌을까. 대숲천지였던 하동과 화개에 이르는 섬진강에 그 아픔이 아직도 남아 흔들릴까. 사라진 대숲도 아까워라. 그 넓고 푸르렀던 대숲은 제방공사 사업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한다. 남은 것은 재첩잡이다. 

사람이 떠나버린 포구와 섬진강에, 아직 사람과 어울리는 이 재첩잡이는 원시적이고, 무척이나 토속적이며, 하동적이다. 하동에서만 볼 수 있는 이 진풍경은 천금의 구경거리다. 7~8월, 섬진강 걸갱이 재첩잡이는 섬진강을 빼곡이 채우고, 수 천 명이 물질을 하는 진풍경은 그야말로 ‘사람반 물반’이다. 재첩잡이로 한 해, 집 한 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한 밑천 잡고 아들딸 장가보내고 공부시킨 이야기, 투전판에서 황소 서너 마리를 뒤끝이 좋지 않아 한 방에 날려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섬진강을 끼고 재첩잡이로 유명한 신비, 시목 노화 목도 광평 신율마을은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계십니다’란 말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한국 최고의 명소다. 

-600리 물길이 만든 섬진강 나루터 문화를 찾아서

[이야기 동선] 
하동포구 80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신방나루터에서 화개나루터까지가 주요 동선이다. 나루터 곳곳에 남아있는 전설과 역사적 사실을 훑어가며 무엇보다 섬진강이 삶의 터전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좇아간다. 신방나루터 -> 목도나루터(하동포구공원) -> 신기포구(재첩특화마을) -> 광평나루터 -> 송림 공원 -> 해량포구 -> 돌티미나루터 -> 개치나루터 -> 섯바위 나루터(평사리 공원) -> 화개나루터(화개장터) 

-섬진강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사람은 바라볼 뿐 가까이 가질 않네

[왜 하동포구 80리에 주목하는가] 다리와 철로와 육로가 발달되자, 사람과 같이 했던 섬진강의 풍성함은 이미 오래 전에 기울었다. 섬진강은 수천 년을 함께한 그때처럼 그저 ‘와서 놀아라’라 한다. 사람이 있었던 포구, 사람과 함께 했던 섬진강 포구는 언제나 북적였다. 도로가 뻥뻥 뚫리고 차량이 늘면서, 배를 타고 건넜던 그 로맨틱한 뱃길인 포구는 어느 날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 수위가 낮아지고 수량이 줄어든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편리함이 뭔지, “워어이, 어이~” 부르던 소리가 사라지고, 강과 마을을 낀 나루터가 사라지더니, 섬진강은 이름그대로 그저 강으로만 존재하기 시작했다. 수천 년을 흐른 뱃길, 역사이전부터 건넌 물길이건만 고작 50년 만에 포구는 사라진다. 어울리고 함께 했던 강은 이제, 바라만 보는, 구경만하는 강이 돼 버렸다. 강과 사람은 멀어져 버렸다. 뱃길과 같은 방향의 19번국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하동포구 80리…. 사람이 있는 강은 어디에 가버렸는지…. 강은 도로와 가까워질 수 없게끔 평행으로 달리며 멀리 고적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섬진강은,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묻는 듯하다. 또 섬진강을 옆에 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 알라는 듯 신호를 주는 듯하다. ‘내가 너희를 버린 적이 없었다’며 찾아 안기길 바라지만 선뜻 강으로 가기가 쉽지 않음은 왜 인가.  경북 예천은 낙동강 뱃길의 삼강나루터와 주막을 복원해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전남 곡성의 호곡나루터는 주민들이 읍내로 장보러 갈 때 이용하던 줄 배가 요즘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물이 됐다.
2005년인가. 세계적인 건설업체 파슨스사의 마이클 브래디 파슨스 수석부사장은 "섬진강 하류 일대는 천혜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갖춰 세계적 관광 명소로 손색이 없다"며 "이 일대를 아시아권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가꿔나갈 계획"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번성했던 주막거리, 강 양쪽을 잇는 줄 배, 걸갱이와 체소쿠리를 이용한 재첩잡이…. 하동군 만에서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체험관광이다.

-국민의 80%가 마음의 고향으로 섬진강을 꼽듯이 저리 아름다운 섬진강이여

[섬진강 지형] ‘모래가람’, ‘다사강’, ‘두치강.’ 뭔 이름 인고 하니, 섬진강이 하도 모래톱이 하고 희어, 선조들이 부른 섬진강의 애칭이다. 섬진강,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말했다. “섬진강은 서쪽은 옥과, 동복, 곡성이다. 물은 압록진에서 비로소 동쪽으로 굽어 흘러 악양강이 되어 남해 조석(潮汐)을 통하고, 지라산(지리산) 남을 돌아 섬진강이 되어 남해에 들어간다.” 섬진강은 전북 남동부와 전남 북동부, 경남서부를 흐르는 강이다. 산에서 강으로 바다로, 다시 바다에서 강으로 산으로, 호남에서 영남으로, 또다시 영남에서 호남으로 사이좋게 번갈아 다니는 뱃길과 육로(陸路)로 이어져 있다. 구불구불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기막힌 절경을 만들고 사람의 혼을 빼듯 흐른다는 뜻이다. 아름답다. 국민의 80%가 마음의 고향으로 섬진강을 꼽듯이. 섬진강 물길이 휘돌아 흰 모래톱을 쌓은 곳에는, 섬진강이 부르지 않아도 비단금침 삼아 냅다 눕고 싶어진다. 섬진강은 언제나 사람을 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전북 진안 데미샘.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시작해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전남의 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해 바다에 이르는 600리(212.3km) 물길이다. 상류는 대체로 강 너비가 좁지만 하동 쪽 하류는 넓고 시원하게 트인 대장관을 만들어낸다. 강바닥의 암반이 많이 노출돼 항해가 불편해 하구 쪽 뱃길만 발달했다. 
뱃길은 강바닥이 점점 높아지면서 처음엔 구례까지 돛단배(상선)가 드나들었지만 점차 화개, 하동읍, 신기 등 아래 하구까지 내려왔다가 그도 사라지게 된다. 구례장이 처음 번성했고, 나중엔 화개장터, 그리고 하동읍 쪽에 장이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섬진강은 유역면적 4,896.5 ㎢, 길이 212.3km로,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3도의 크고 작은 15개 지역이 섬진강 자락을 끼고 있다. 총 유역 면적중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가 44%, 경상남도가 9%이다. 이 9%가 섬진강의 ‘알짜배기’다. 섬진강은 화개에서부터 남해 바다로 흘러가고, 하동군은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이다. 

▣‘섬진강…. 섬진강….’ 그 이름을 되뇌여 본 뒤 섬진강의 뜻을 알면 놀라고….

[섬진강의 유래] ‘섬진강’이라 하면 푸르고 맑은 강 풍경이 먼저 떠오르는데다가 어감이 예쁜 탓으로 일반적으로 곱고 아름다운 느낌을 갖는다. 두어 번 되뇌여 보면 안다. ‘섬진강…. 섬진강….’ 하지만 ‘섬진강’ 이름 뜻을 알고 나면 다들 놀라워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뜻이라는 사실에서 ‘섬진’은 두꺼비에서 유래한다. 섬진강(蟾津江)이란 이름은 본래 고운 모래가 많아 가람, 사수천, 사천, 다사강으로 불리었다가 고려 초기부터 두치강으로 불렸다. 고려우왕(1385년 경)때부터 섬진강으로 부르게 됐다. 그러나 섬진강을 끼고 사는 광양과 하동 사람들 사이에는 임진왜란 때에 생겼을 법한 두꺼비 전설에서 이 이름이 비롯된 것으로 안다. 광양군 진상면 삼거리에 두꺼비가 떼 지어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들이 강을 타고 올라오자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왜적의 병선이 하동읍 건너 강가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수십 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울부짖었다. 그리하여 섬진강변은 마치 두꺼비들이 쌓은 만리장성과 같았고 기세에 눌린 왜적들은 감히 상륙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 버렸다. 그 뒤부터 두치강이라 부르던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따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하동읍 강 건너 섬진나루 앞에는 수월정이라는 정자와 두꺼비 석상 4기가 놓여 있다. 이 두꺼비는 마치 밤낮으로 섬진강을 지키고 선 파수꾼 같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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