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 하동뉴스
  • 승인 2022.11.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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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칼과 피, 이데올로기와 분단, 문학과 현실이 녹은 섬진강은 대하(大河)다

[섬진강의 역사] 섬진강 유역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삼국시대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의 영역이었다가 백제에 편입되었다. 인근 진주도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섬진강은 백제가 흥한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무진주와 완산주에 속했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후백제 견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이곳 섬진강은 자나 깨나 ‘왜놈’의 원성이 들끓었던 곳이다. 팔도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첫 의적 장영기의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주요 활동 루트로 섬진강을 이용했고, 장영기의 뒤를 이은 홍길동도 역시 지리산과 섬진강을 이용해 정보를 캐고 토호와 부패비리 관료를 벌하는 주요 통로로 섬진강을 이용했다. 조선시대 때도 섬진강은 왜구의 주요 침입로였다. 바다를 건넌 왜구는 물살 좋고 바람 좋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유유히 노략질을 해댔을 것이다. 그냥 확, 섬진강물이 넘쳐 다 수장을 시켜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오죽했겠나마는, 섬진강은 그것도 역사라며 아프게, 묵묵히 받아주고 만다. 섬진강 중류에 ‘석주관’에는 의사 7명의 묘, 칠의사가 있다. 임란에 이순신 장군에게 그렇게 식겁을 하고도, 왜군은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당시 왜는 전라도를 중점 공략했고, 전라와 경상의 경계지인 이곳 섬진강은 헤아릴 수없는 피와 눈물을 흘린 지역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수만의 왜병이 석주관으로 들이닥쳤다. 워낙 ‘머릿수’로 밀어 부치는 왜군을 조선의 민과 관은 결국 당해 내지 못했다. 왜군이 구례 마을로 쳐들어가 방화·겁탈을 자행했고, 보다 못한 구례의 선비인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은 구례와 하동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해, 다시 석주관을 방어했다. 왜군은 대군을 이끌고, 하동 쪽에서 집중 공격했다. 1000여 명의 의병과 150여 명의 승병(僧兵)이 무참히 도륙 당했다. 도륙이란 ‘개·돼지까지 다 죽여 없앤다’는 뜻이다. 이들을 기념한 곳이 ‘칠의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섬진강 유역의 전 지역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임실에서부터 순천, 광양, 하동까지 농민군이 크게 활동한다. 하동군은 이 시기 일대 혼란을 겪는다. 소설 토지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구천의 탄생’도 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반일의병 투쟁이 전개되고, 이후 남북 분단으로 섬진강 유역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장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투쟁의 주요 거점지가 되기도 했다. 빨치산의 지리산 유격전구는 남한지구 유격대 총본산으로 남로당 거물 이현상이 관할하면서 북으로 무주 덕유산, 남으로 광양 백운산을 연결하며 활동했다. 칼과 피, 아픔과 슬픔, 이데올로기와 분단, 문학과 현실이 고스란히 녹은 강, 섬진강은 이런 의미에서 대하(大河)다.
 
-노비로 씨받이로 팔려가는 민초의 눈물...섬진강과 함께 노래로 남고

[하동포구 80리, 신방~화개 나루터까지]‘노비로 팔려가고, 씨받이로 팔려가는…’ 핍박받던 백성들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지, 가진 것 없고 저항할 줄도 몰랐던 백성들의 운명이 때론 얼마나 처절한지, 못난 역사가 만든 백성의 수난은 처절한 눈물이었다. 섬진강만 알고 있는 진실은 노래로 남아 버렸다. 노비로 팔려가고/씨받이로 팔려가는 사람/또 항구나 낯선 도시/심지어는 일본으로 만주로 그리고/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먼 시베리아 동토의 땅으로/살아가기 위해서/떠나는 사람들로/섬진강 나루는/이별의 나루가 되고/눈물의 바다 되었지. 일본 놈에게 수탈당하고/높은 사람에게 착취당하는/굶기에 딱 알맞은 농사를/누가 지으려고 하겠는가/물새도 울고/나룻배도 울고/강물도 울던/섬진강 나루/하동포구 선착장/객주집 분녀 때문일까/만석이는/탄실이도 모르게 섬진강을 떠났다/도망가듯 달아나 버린 것인지…. 하동 고전면이 고향인 대중가요 작사가 정두수의 ‘섬진강’이란 영상으로 엮어진 긴 시(詩)에는 섬진강 하동포구의 옛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이렇듯 섬진강 하동포구는 삶의 애환이 흐르는 곳이었고, 우리네 민초들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피맺힌 현장이었다. ‘하동포구 80리’는 섬진강 물길이 남해바다에 이르는 하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화개까지의 물길을 말한다. 실제로는 80리가 못된다고 하고 더러는 80리가 넘는다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섬진강 하동포구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6·25 전쟁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나루터마다 번창을 이뤄 수 백 척의 어선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점점 토사가 쌓여 강바닥이 높아지고 개발과 함께 강의 형상이 바뀌어 큰 배가 다닐 수 없게 됐다. 뱃길은 끊긴 지 이미 오래다. 상선으로 붐벼대던 기운이 쇠락한 뒤에도 사람들의 뱃길 이용은 여전히 활발했다. 1970년까지만 해도 하동포구 곳곳에 있는 나루터들은 강 양쪽을 넘나드는 전라도와 경상도사람들의 대중 교통수단이었다. 현재는 사라졌거나 흔적만 남아있는 섬진강가 나루터는 하동 지역에만 해도 여러 곳이었는데, 화개나루와 해량나루, 신기리의 상저구나루터가 그중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나루터로 꼽을 수 있다. 하동포구 80리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도 곳곳에 부산이나 통영으로 향했던 나루터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하동포구 80리’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마음에 남는 까닭은 무엇인가. 섬진강 뱃길의 절경 때문이고, 애환 때문일 것이다. 흰 모래톱과 강을 따라 이어진 대숲, 그리고 갈대밭과 작은 배들이 그려내는 경치, 고개를 들면 멀리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준령들과 지리산에서 몇 겹으로 쌓여 내려오는 준령들, 이는 신만이 그려낼 수 있는 강의 ‘청학동’이라 할 수 있다. ‘하동포구 80리’를 따라 길을 나서는 것은 섬진강을 눈으로만 보고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섬진강의 역사와 함께 해왔던 하동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오롯이 마음에 담아가는 여행이다. 그리고 사라져간 나루터에 대한 재발견이다. 

-옷을 홀라당 벗고 ‘뿅’하고 변신하는 왜적 도술사를 잡는 방법은?

[신방나루터]신방나루터는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에서 고남교를 건너 하동포구터널을 지나면 숨은 듯이 있는 마을이다. 국도 19호선이 4차선으로 이전 확장되기 전 옛길로 접어들면 나오는 강촌나루터다.‘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그런 노래 따라 봄바람이 부는 곳 같다. 신방의 뱃길과 나루터는 여수나 부산 등지에서 들어오는 배들로 붐빈, 바다의 항구 같았다. 신작로가 개설되고, 2차선 도로가 생기면서, 하동읍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위치해 진주나 남해 등지에서 들어오는 차량들로 사시사철 흥성거렸다. 지금도 흥청거린 역사의 옛 모습이 남았음인지, 하동에선 그래도 최신 건물까지 볼 수있는 곳이다. 옛날 번창했던 나루터는 찾아볼 순 없다. 강가의 작은 나루터에 재첩잡이 배 여러 척이 묶여있고, 저무는 해에 고즈넉한 마을일뿐이다. 멀리 고현산성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끼 끼고 무너진 성터는 임란의 역사를 안은 채 마치 신방나루터 잔잔한 물결에 제 모습을 비추고 있는 듯하다. 4월 청명을 앞두고 강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매화꽃이 지고 개나리가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5~6개의 식당들 앞에는 재첩잡이 배들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건너 강둑 너머로 있을 법한 광양 쪽 마을은 길고 높은 둑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강으로 들어서는 작은 길은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는데, 자동차 바퀴가 지날 때마다 아래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눈여겨보니 모두 재첩껍데기였다. 마치 자잘한 자갈처럼 깔려있다. 잔잔한 물결위로 물새 떼가 날아드는 듯하더니 잠시 보이지 않는다. 잔뜩 짐을 실은 상선도 뱃노래를 부르는 뱃꾼도 없이 섬진강 물길만이 잠시 긴장을 한 채 물소리마저 죽이고 푸른 남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딱 걸려 버린’ 도술부리는 해적, 풍성한 뱃길에는 이름난 해적들도 많아…. 귀여운 해적이라고 해야 되나 웃기는 해적이 있었다. 화개장터까지 상선들이 드나들던 무렵, 섬진강 하구에 일본 해적들이 수시로 나타나 물건을 약탈해 갔다. 이 왜적 중에 도술을 부리는 놈이 있었으니, 이놈이 골칫거리였다. 포도청에서 ‘딱 걸렸다’ 싶어 잡으려 하면, ‘푸다닥’하더니, 옷을 홀라당 벗고 새가 돼 도망치고, 나무가 되었다가 물고기가 되기도 하고, 참 기막힌 놈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해적이지만 ‘그놈 참 용타’며, 마냥 해적질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 포졸이 있었다. 도술부리는 해적을 잡기위해 온 나루를 다 뒤지다가 잠시 쉴 참으로 나무 그늘을 찾았다. 하품을 하다가 봤는지.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웬 새의 목에 옷고름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 봐라.’ 포졸은 딴 짓을 하는 척, 냉큼 손을 뻗어 새의 주리를 잡고 틀었다. 그러자 눈앞의 새가 캑캑거리다가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이 웃긴 놈의 해적 도술사는 그렇게 잡혀버렸다. 포졸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둔갑을 하다보니 옷고름을 풀지 못했던 것이라 한다. 이와 엇비슷한 이야기는 섬진강 가장 하구지역에도 전해진다. 갈사리 나팔마을에 있는 밭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꽃집터’라 일컫는다. 도술사 정어령의 꽃대궐 같은 기와집이 있던 곳이다. 도술사 정어령이 섬진강 뱃길을 드나드는 상선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일삼다 결국은 잡히게 되는데 알고보니 큰 바위 밑에 살던 늙은 지네 였던 것이다. 섬진강변에 내려오는 민담은 참으로 많다. 가지 수도 가지 수지만 이야기 속에는 당대의 현실을 담고 있어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위의 두 이야기들은 섬진강이 예전에 얼마나 흥성한 뱃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들이다. 원래 쉴새없이 배가 드나들고 물자를 풍부하게 나르는 곳에는 해적 떼들이 속출한다지 않은가. 이곳 전설에 유독 도술을 쓰는 신출귀몰의 도둑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그만큼 섬진강 하동포구 80리 길이 규모가 큰 뱃길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라 할만하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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