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연재] 하동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 하동뉴스
  • 승인 2022.12.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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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문화관광스토리텔링

-하동포구 옆 갈대밭, 아! 키스하기 좋은 곳

[하동포구공원, 목도나루터] 하동포구는 님을 떠나보낸 곳인가. 쌍돛대님을 싣고 포구로 들고/섬진강 맑은 물에 물새가 운다 /쌍계사 쇠북소리 은은히 울 때/노을진 물결 위엔 꽃잎이 진다/팔십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내님 데려다주오/흐르는 저 구름을 머리에 이고/지리산 낙낙장송 노을에 탄다/다도해 가는 길목 섬진강 물은 /굽이쳐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팔십리 포구야 하동포구야 /내님 데려다 주오.” 

가수 하춘화 씨가 애간장을 끊듯 부른 ‘하동포구 아가씨(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는 끝없이 떠나버린 ‘자기야~’를 부르고 있었다. 청학동 묵계 댐과 하동댐에서 흘러온 횡천강은 목도마을 입구에 있는 횡천교 아래를 지나 섬진강으로 더한다. 이곳 참 멋지고 고즈넉하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하동포구공원이 있는 이곳은 남쪽으로 하동포구 80리길에서 갈대밭과 갯벌이 가장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국도 19호선이 이곳으로 뚫리지 않았던 시절, 횡천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이곳 유역은 드넓은 갈대밭이, 압도하듯 보는 사람을 에워쌌던 곳이다. 하동 관광의 첫인상이었고, ‘멋지다!’는 감탄이 ‘퍼억’하니 다가와 박히던 곳이다.

‘조금만 머물다 가시죠!’ 갈대밭이 차분히 고개를 숙이는 곳이지만 자칫하면 지나쳐버리기 쉽다. 이곳은 현재 하동포구공원으로 조성이 돼 있다. 강을 따라 소나무 숲길도 조성돼 있다. 뒤로 어린 산수유나무며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고, 푸른 소나무 숲은 강바람을 다독여 부드러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분위기 때문인지, 키스하기 좋은 곳이다. 얼마나 많은 연인이 이곳에서 헤어지고 만나고, 또 기다렸는가. 하동포구공원은 입구에서부터 섬진강 80리 물길이 제대로 느껴지는 곳이다. 널따란 섬진강은 구경 온 사람의 가슴을 뻥 뚫어주고, 속이 훤하니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소나무 숲 사이 조형물로 세워놓은 황포돛배가 있고, 선착장에는 배가 묶여있다.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물에 잠겨있다. 이곳 물길을 따라 여수 남해 광양 등으로 나갔던 수십 척의 돛단배와 거룻배들이 밀물이 들면 다시 돌아오곤 했다. 배 위에는 피조개를 썰어 소주 한잔 곁들인 상인들의 노래 자락이 흘러나오고, 여 상인들의 왁자한 수다소리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나루터 한쪽에는 ‘이곳은 재첩종패를 뿌린 지역이라 재첩 잡이를 금지한다’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근처의 고전 신월 대숲은 드라마 ‘허준’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허준! 돈벌이가 되어버린 의술에 일침을 가하며, ‘의술은 하늘이 내린 기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인술’이라며, 전 국민의 50%를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 모았던 그 유명한 드라마가 ‘허준’이다. 

-일두 정여창, 귀양가 죽고 부관참시까지 당하고 다시 사면복권

[목도강정유허비] 이곳 목도마을은 유배당한 선비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예로 일두 정여창을 들 수 있다. 일두 정여창(1450~1504)은 연산군의 폭정을 보다보다, 요즘말로 사표를 내고 하동 화개에 내려와 악양정을 지어 살았다. 그 뒤 다시 하동읍 목도리 섬진강가에 목도강정을 지어 낚시를 하거나 강가를 거닐며 세월을 보냈다. 꼭 과자이름 같지만 ‘목도강정’은 과자이름이 아니다. 경치 좋은 곳, 지붕과 기둥만으로 짓는 정자 이름이다. 현재 목도강정은 없다. 이곳엔 목도강정유허비만 있을 뿐이다. (정여창이 지은 악양정은 화개면 덕은리 마을 가운데 있으며 1901년 중건했고, 중건기는 면암 최익현이 썼다.)  정여창은 조선의 모진 임금, 폭군으로 불리는 연산군의 스승이기도 했다. 정여창은 스승 김종직이 쓴 글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김종직이 쓴 글이란 조의제문 <弔義帝文>이란 글로, 단종의 왕위를 뺏은 세조(世祖)를 은근히 비난한 글이었다. 이글은 김종직의 또 다른 제자인 김일손이 연산군 아버지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이 발단이 돼,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일손을 처형당한다.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과 함께 김종직의 의 제자였던 정여창은 ‘조의제문을 실을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간다. 귀양살이에서 55세에 죽고 만다. 연이은 갑자사화로 정여창은 끝내 스승과 같이 ‘부관참시’까지 당해버린다.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해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중종에 이르러 정여창은 사면복권 된다.

-손 장군이 호랑이를 베어죽이고, 하동포구에서 가죽을 벗기고 고향 앞으로….

[손 장군 호랑이 이야기] 하동읍 목도리는 옛날부터 영지라 일컬었다. 이곳에서는 언젠가는 ‘불세출’의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마도 ‘손 장군’이 그 인물이었을 거라고들 말한다. 손 장군이 누구인지 어느 시대 사람인지도 불분명하다. 어쨌든 손 장군은 지략이 뛰어나고 도술을 부렸으며 누구나 한 번 보면 그 인물의 내력을 알아 모두들 두려워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손 장군이 쉬려고 했는지, 고향 하동으로 내려올 때의 일이다. 적량에서 하동으로 넘어오는 작은 고개에서 한 떼의 총각들을 만나 같이 쉬고 있었다. 얼마 뒤 한 총각이 손 장군에게 들어 라는 듯이 “배가 고프니, 슬슬 들판으로 내려가 요기나 하자구” 하더니, 자기들끼리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손 장군인가 봐”하곤 손 장군의 눈치를 슬슬 보는 듯 했다. 총각들은 손 장군의 눈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고, 지금의 하동읍의 큰 들인 ‘너뱅이들’로 한참 내려가고 있었다. 둑이 없던 시절인지라, 당시 너뱅이들은 섬진강의 경계였다. 때마침 고개를 넘어오던 한 늙은 스님이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손 장군 옆에 앉았다. 스님이 뚱하니 손 장군을 쳐다보곤 불쑥 거울을 내밀었다. 거울을 보니 별 것도 없었다. 씨익 웃어주자, 스님은 금방 떠난 총각들을 보란 듯이 입을 쭉 내밀었다. 방금 쉬다간 총각들은 거울 속에선 모조리 호랑이였고, 들에서 일하던 사람은 사슴으로 보였다. ‘뭐여!’ 순간, 손 장군은 총각들이 호랑이였다는 것을 알아채곤, ‘너뱅이들’로 총알같이 날아갔다. “이 요망한 놈의 호랑이 새끼야. 어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느냐”며, 칼로 후려쳤다. 단박에 3명이 쓰러졌고, 쓰러지면서 호랑이가 됐다. 나머지는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호랑이밥이 될 사람을 ‘호식간다’라 했던가. 손 장군은 호식갈 사람을 구해낸 것이다. 손 장군은 호랑이 가죽을 하동포구 소나무밭에서 가죽을 벗기고, 너른 들을 돌아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손 장군은 나중에 나라를 위해 아주 큰일을 했다고 한다.

-아줌마 뱃사공 옥상, 놀려대는 아이들에게도 1만 번 절을 하고….

[일본에서 온 옥상아줌마] 80년대 초, 하동 건너 광양 돈탁 마을에 ‘옥상 아줌마’의 이야기가 전한다. ‘옥상’은 광양과 하동포구로 노를 젓는 여자 뱃사공이었다. 옥상 아줌마는 한국인 남편 김녕 김 씨를 따라온 일본인 여성이었다. 한국말을 서툴렀고, 남루한 옷차림에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놀려댔다. 그럴 때면 ‘옥상’은 아이들을 향해, 공손히 그것도 수없이 인사를 하곤 했다. 가난한 남편 덕이었는지,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손에 익은 노젓기를 시작해 입에 풀칠을 했다. 하지만 강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목도 마을 사람들도 가난한지라 배 삯을 그때그때 줄 수 없었다. 옥상아줌마는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뱃길을 열었고 봄철 보리 추수, 가을 벼 추수 때면 마을 한 바퀴를 돌며 배 삯을 거두어갔다. 보리 한 됫박, 벼 한 됫박 주는 대로 받아가면서도 그녀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단다. 
어느 해 큰물이 났다. 물난리로 상류에서 초가지붕이 떠내려 오고, 소 돼지 염소가 둥둥 떠내려 왔다. 여러 구의 시신이 내려오기도 했다. 섬진강에 남자 뱃사공도 많았지만 하도 위험해 아무도 배를 저어, 강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다. 발만 동동 구르던 때, 옥상아줌마는 강을 향해 공손히 절하고, 배를 저어 강으로 나갔다. 밤낮을 배를 저었다. 건진 시신은 유족들에게 알렸고, 다시 자신은 배를 저어 나갔다. 시신을 찾은 이들이 옥상에게 고마워 절을 하면, 옥상은 더 많은 절을 했다. 광양과 하동에선 “역시 옥상아줌마다”라는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후론 섬진강가에서 누구도 그를 놀리거나 손짓하지 않았다한다. 뒤에 사람들이 왜 그리 인사를 하고 절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 스님을 건너 주었더니, 한 사람에게 만 번을 절을 하면, 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사람이 복을 크게 받는답니다. 절이 아니라 인사를 해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가난했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고 싶어 했던, 여인이었다.

-그림 같은 강마을, 이곳에서 나간 송판은 부산 피난민의 판잣집이 되고

[신기포구] 신기나루터는 그림 같은 강촌(江村)이다. 강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마치 고향집으로 들어서는 설렘이 있다. 누군가는 방문을 열면 섬진강 물결이 한눈에 다 들어와, 물빛만 보면 그날의 날씨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하던가. 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8할의 바람’이라고 했는데, 이곳 신기마을 사람들을 키운 건 8할의 섬진강일 듯.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1차선 정도의 아스팔트길이다. 강을 따라 이어진 길은 높이도 강 표면과 엇비슷해 마치 물 위를 지나는 느낌이다. 강 위쪽으로 눈을 들면 멀리 경전선 철교가 보이고 건너 백운산 능선이 보인다. 신기나루터는 해방 후 아주 번성했던 나루터이다. 신기포구 또는 신기리 부두라 일컬을 만큼 상업의 관문이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부두횟집’ 등의 상호가 보인다. 이곳을 드나드는 배들은 대부분이 부산으로 운송되는 목재를 실은 배였다. 옛날부터 하동의 목재산업은 아주 유명했다. 하동장작은 지리산 장작의 대명사였고, 하동 장을 번성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한다. 당시는 육로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리했던 것이다. 한국동란이 날 무렵이 최고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는데, 하동읍 내에 대형 제재소가 잇달아 생겼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나가는 목재의 대부분이 부산 피난민의 판잣집을 짓는 송판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곳 신기리 상저구 나루터에는 정기적으로 발동선이 10~20척 씩 들어오기도 했다. 장꾼과 수산물을 가득 싣고 올라온 배들이었는데, 모두 가까운 하동 장으로 가는 물품들이었다. 이곳 나루에 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하동 시장에 사람이고 물건이고 없어 장이 설 수 없었다 한다. 하지만 한국동란이 끝나고 섬진강 주변이 빨치산과의 접점지역이 되고, 산골은 황폐화 되면서 이곳 신기나루터도 다른 나루터와 함께 장꾼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기울어지게 된다. 경전선이 개통되는 등 육로가 발달되면서 이곳 나루터와 뱃길도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다. 신기마을은 이제 재첩특화마을이 됐다. 마을 뒤로 놓인 국도 19호선 옆으로 조성된 신기재첩특화단지는 최상의 재첩을 맛보고, 재첩 잡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전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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