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스토리텔링
[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스토리텔링
  • 하동뉴스
  • 승인 2023.01.1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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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전 하동인구 20%는 호남사람, 사돈끼리 장에서 만나 막걸리 한잔…. 
[광평나루터] 하동송림 위를 지나는 경전선 철교가 보인다. 그 아래 쯤 광평마을이 있다. 광평나루터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잠깐 머물러 쉴 수있는 곳이다. 주변에 강변체육공원이 조성돼 있다. 강 건너 광양쪽 돈밧꼬나루와 뱃길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곳이어서, 전라-경상 양쪽 나루 모두를 ‘돈밧꼬나루’라고 불렀다. 나루터를 건너면 돈을 받고 건넌다고 해, 돈밧꼬나루인가? 이곳 나루터는 하동읍으로 들어서는 길이 바로 이어져 있어, 장날이나 통학 시간이면 장꾼들과 학생들로 몇 백 미터 줄을 서야 했다. 이런 모습도 장관이었을 거다. 이 속에는 또 멋진 로맨스도 있었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 만난 여학생이 아니라, 나룻배 위에서 싹튼 사랑. 사람이 모인 곳에 연애가 생기는 법이고, 죽니 사니, ‘사랑이 아니면, 같이 빠져죽자’는 소설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백사장에 카세트를 들고 뛰어든 고등학생 중엔 진주까지 원정 가서 배운 고고 춤, 말 춤 토끼 춤을 선보이기도 했단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섬진강 건너 전라도 다압이나 진월 일대의 학생들은 생활권이 하동읍 이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하동처녀와 광양총각의 사랑이야기, 광양처녀와 하동총각의 스캔들이 포구주변에 쫙 깔려 소문이 꼬리를 타고 흘러 흘러 읍내를 뒤덮기도 했다. 

당시, 하동군 학생수의 10~15%가 이곳 전라도 학생일 정도였다. 강 건너 진월면 오사리, 신구리 등지의 학생들이 산을 넘어 광양으로 넘어가기보다 이곳 돈밧꼬 나루를 이용해 섬진강만 건너 하동 중·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하동 장은 섬진강 하구 쪽 생활권의 중심이 되다보니, 오래전부터 경상도니 전라도니 나누어 생활하기보다 한 생활권으로 묶이다보니 자연스레 인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교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하동송림을 사이에 두고 ‘아랫장’과 ‘웃장’으로 나뉘어 있던 하동 장은 70년대 이후 지금의 중앙시장으로 합해졌다. 70년대 이전까지 하동군 인구의 20%는 호남사람들이라, 하동장날이면 여기저기서 영호남 사돈끼리 손을 맞잡고 “아이고 사돈 장에 왔소.”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바깥사돈들끼리 약주 한잔 걸치는 것은 예의인지라,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손주 놈들 얘기를 읊어대는 모습은 하동 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사람 사는 풍경이었다. 전설 같은 얘기 중에 ‘낮술 먹고 취해 지애비도 몰라 본다’는 말이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이 이곳 하동에서 그런 작자가 있다는 소문은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는다. 다 웃자고 하는 소리들이다. 겨울 철 장날이면 꽁꽁 언 섬진강 위로 또 하나의 장관이 펼쳐졌다. 섬진교 위쪽 물길이 꽁꽁 얼면 그 위를 나뭇짐을 진 나무꾼들이 줄을 이었다. 하늘같이 높이 재어 올린 나뭇짐을 지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나무꾼들의 모습은 줄광대와 진배없었다. 아, 그런 광경을 지금 볼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송림에 부는 꽃바람 속, 유치찬란한 로맨스는 없었을까. 
[하동송림] 하동송림…. 솔밭에 솔 갈비가 발아래에서 푹신푹신하다. 어디서 맛볼 수도 없는 대단한 체험이건만, 사람들은 이 맛을 제대로 모른다. 옛적엔 지금의 몇 배로 지천이었다는 송림, 옛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다. 송림은 전신을 깨우고, 마치 강바람은 ‘하동에 사시오’ 유혹을 하는 것 같다. 송림은 하동과 광양을 잇는 네 개의 다리 중에서 유일한 인도교인 섬진교가 놓인 하동읍 광평리에 있는 큰 솔밭이다. 솔밭 왼쪽으로는 경전선 철교가 지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광양으로 건너가는 섬진교가 놓여 있다. 솔밭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당시 부사 전천상이 비바람과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양이 ‘상림’이라면, 하동은 ‘송림’이다. 1490년 일두 정여창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훨씬 더 오래전에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곳이다. 섬진강 하구 가장 넓은 백사장이 송림을 안듯 편안해 뵌다. 3천여 평에 사철 햇볕을 받고 여문 300년생 소나무는 750여 그루, 부사 전천상이 조성할 당시에는 광평 전역이 이 소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더 있으면 초봄에 송이버섯까지 툭툭 터져 오를듯한 분위기다. 송림 앞 백사장은 달밤이면 꽃 각시  새 단장하고 손에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가 펼쳐졌을 법하다. ‘날 잡아봐라’식의 유치찬란한 로맨스가 있을 것 같은 곳, 송림은 때론 엉큼하고, 상쾌하고 발랄하다. 
한때 모래찜질이 아낙들의 신경통 산후통에 효험이 있다는 말이 돌아, 하동 송림 앞 모래톱은 그야말로 아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흰 백사장 여기저기 마치 둥근 봉분처럼 봉긋봉긋 떠있는 것들은 모두 모래 깊숙이 몸을 묻고 누워 잡담하는 아낙들의 모습이었다. 옛 시인들은 섬진강 맑은 물과 어우러진 이 솔밭에 앉아 ‘하동은 백사청송의 고장’이라 노래했다. 솔밭 가운데는 전국 제일의 활터였던 '하상정'이 있다. 지금은 그 터만 있고 활터는 옮겨졌다. 궁수들이 겨누던 활시위 소리가 마치 물 위의 노래 가락처럼 들려올 것 같다. 이곳이 좋은지, 야외 전시회나 공연 등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문화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부산영화제 때 광안리 바다 위에 스크린을 설치한 것처럼 이곳에 그런 스크린을 설치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해저물녘이 하도 멋져 그런지, 프로 포즈 장소로 유명하고, 이곳에서 프로 포즈를 하면 100% OK!란다. 노을이 하도 좋아서, 강이 하도 좋아서. 

-동학혁명을 온 가슴으로 지켜본 나루터, 이곳에 프로 포즈를 한다면?
[해량포구] 가장 번창했던 나루는 해량포구였다. 현재 하동문화예술회관과 종합사회복지관 등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섬진강 물결 위로 백운산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곳이고, 섬진강둑을 걸어 데이트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건너편 광양 쪽 섬진나루는 임란에 두꺼비가 조선군을 건너게 했다는 전설이 남아, 지금의 ‘섬진강’이란 이름을 얻게 한 현장이기도 하다. 악양 방면, 하동읍 바로 위쪽에 있고 역사적으로는 숱한 고난을 겪은 곳이다. 특히 동학혁명의 소용돌이를 온 가슴으로 지켜본 나루터이기도 하다. <오하기문>에 해량포구를 “동학혁명 당시 하동읍 북서쪽 5리 지점 해량포구는 동학군과 관군 민포군의 접점이 아주 치열했던 곳이다. 전라도 동학군들이 짚둥우리 뒤에 몸을 숨기고 이곳을 건너와 10일 만에 하동읍을 점령한 뒤, 화개동과 악양, 적량 등에 있는 민포 수창자를 색출했다”고 적고 있다. 하동읍지에는 1894년 10월 27일 광평 송림(현 하동송림)에서 민포군과 관군이 동학군 700여명에 맞서 싸웠고, 11월 17일에는 광평에서 섬진강을 건너간 민포군들이 광양 매재, 삼봉산 섬거 등에서 동학군에 맞서 승리를 거뒀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은 관과 토호들이 민초의 ‘피를 빤’ 것이 발단이었다. 춘궁기의 한 되를 빌려주고 추수철 서너 가마로 돌려받는 횡포 등이 그것이다. 하동으로 몰려온 동학군은 전라도 고부의 그 유명한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1844-1911)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습격한 뒤인 그해 10월말께 나타났다. 폭정으로 민초들은 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들었고, 화전민이 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요즘이면 이런 봉기가 아닌 ‘주민소환제’로 선출직 공무원을 끌어내릴 수 있지만 당시의 민초들은 관과 양반의 밥이었다. 사람이 밥이 될 순 없는 법이어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해량포구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거룻배와 돛단배가 수십 척씩 닿아 늘 흥성대던 곳이다. 나루터 근처 이 일대 아주 유명한 소시장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나루터와 함께 그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이 일대가 매립되어 지형이 많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다보면 배를 묶었던 흔적들이 나온다 한다. 맞은편 쪽 섬진강 둑이 띠 잔디를 덮고, 수 킬로미터를 흐르고, 둑 아래엔 국도 19호선이 지난다. 둑에는 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들이 놓여있다.

-‘없는 놈은 나랏님도 못구한다’는 말이 하동 섬진강변에서 생긴 말이던가.
[하동에 온 숙종대왕] 하동읍에 숙종 임금이 3번이나 내려왔다? 하동에 거짓말 같지만 전해오는 유명한 숙종의 이야기가 있다. 한 겨울에 숙종이 변장을 하고 멀고먼 하동까지 내려와 민심을 살피고 있었다. 한 밤중에 어느 집에 이르렀는데 방문에 초롱불 그림자에 비친 부부의 모습이 괴이쩍었다. 책 읽는 소리가 들리고 바느질을 하는 듯한데, 부부는 등을 돌리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비벼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희한 빠꼼 했다. 숙종이 인기척을 내고 부부를 불렀다. “어째 등을 돌리고 앉았소. 바깥에서 보니 참 이상해서….” “선비님, 저희 남편은 평생 글만 읽고 일을 하지 않아 땔 나무가 없어, 서로 등을 비비면서 따뜻하게 하는 중입니다요.” ‘추워서 서로 등을 비빈다!?’ 숙종은 기가 찼다. 숙종은 부부가 안됐던지 벼슬이라도 줄 요량으로 묘안을 짜냈다. “이보시오. 며칠 뒤에 급하게 치르는 과거가 있답띠다. 나도 과거 보러 가는 중인데 한 번 응시해 보시오.” 과거 날이 밝았다. 하지만 등을 비빈 가난한 선비는 과거장에 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 ‘허, 참’ 숙종은 난감했다. 할 수 없다 싶었던지 숙종은 한 밤 중에 금덩어리 하나를 들고 가서는 ‘잘 살거라’며 방안에 던져놓고 궁궐로 돌아왔다. 몇 달 뒤 숙종은 등을 비빈 부부가 궁금해 다시 하동으로 내려왔다. 정사는 내팽겨 치고 장희빈은 어쨌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벌써 3번째 하동을 찾았다. ‘잘 살겠거니’하고 그 집을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아내는 울상이 돼 있고, 남편은 뵈지도 않았다. “남편은 어디갔소? 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있더마는?” 넌지시 묻자, 아내가 하는 말. “아이고 말도 마시오. 우리 부부가 잠을 자는데 누가 돌덩이를 던져서 남편이 돌에 맞아죽었소”하며, 근처 섬진강 해량나루터와 돌티미 나루터가 떠나가도록 대성통곡을 하는 거였다.
숙종은 ‘참말로…’ 하곤 궐로 돌아갔다. 그 뒤로 ‘없는 놈은 나랏 님도 못 당한다’는 말이 생겼다 한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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