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시리다는 것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시리다는 것
  • 하동뉴스
  • 승인 2023.03.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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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다는 것

                                        허형만


무릎이 시려 자다가 깬다
꽁꽁 언 저수지에서 얼음을 지치며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렸던 어린 시절
그래도 그때는 웃음이 있었다
눈도 시리고
가슴도 시렸던 청춘
그래도 그때는 설렘이 있었다
참 먼 길을 걸어와
좀 쉬어도 되는 나이에
무릎이 시려 자다가 깨는 요즘
새삼 시리다는 것이
한 생애를 되돌아보게 할 줄이야

-계간 『시와소금』(2023년 봄호)

【시인 소개】
허형만 /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황홀』 『바람칼』 『만났다』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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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시립니다. 이처럼 생각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느낌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전에서도 ‘시리다’는 말은 “(몸의 한 부분이) 차가운 것에 닿아서 춥고 얼얼하다.” “(눈이) 빛이 강하여 바로 보기 어렵다.” “(가슴 따위가) 괴롭고 힘들다.”고 설명하는 게 고작입니다. 설명이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포괄적이고 감각적이라는 뜻입니다.
‘시리다’는 말이 그 좋은 예입니다.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은 손발이 시리겠지만,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들에게는 가슴이 시립니다. 입대하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눈이 시리지만, 저승길을 바라보는 노인들은 무릎이 시립니다. “새삼 시리다는 것이/한 생애를 되돌아보게” 하지요.
되돌아보면 굽이마다 시리디 시린 얼음이 박혀 있습니다. 웃음꽃 피는 얼음이 있고, 설레는 얼음이 있고, 가슴 저미는 얼음이 있고, 허무하고 허망한 얼음이 있지요. 어쩌면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가파른 길은 빙판 위에 그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이 이토록 시리고 미끄러운가 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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