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스토리텔링 '끝'
[연재] 하동군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스토리텔링 '끝'
  • 하동뉴스
  • 승인 2023.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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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성에서 내려다본 강나루 풍경에 차마 소리도 안 나와….

[섯바구나루터] 섯바구나루터는 국도 19호선이 악양면 평사리로 들어서는 길목과 화개면으로 나아가는 삼거리가 있는 바로 강가에 위치하였다. 악양면 평사리 외둔마을 앞에 있었다. 나루터 아래쪽엔 악양평사리의 강변공원이고, 뒤로 형제봉 끝자락을 잡고 선 고소성이 버티고 있다. 고소성에서 보는 섬진강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소성과 한산사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에 섯바구나루터의 돛단배는 뭔가 모자란다 싶은 섬진강에 ‘화룡정점’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나루터였던가 싶을 정도로, 지금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드나들던 돛단배도 이야기 속에 묻혀 전해질 뿐이다. 지금의 나루는 화개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약해지면서 너른 모래톱을 만들었고, 모래톱 위로 물버드나무 수십 그루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약 1km정도의 갈대숲이 길게 펼쳐지고 위로 물새들이 날아들고 있다. 강으로 내려서는 길은 없고 높은 강언덕으로 강 건너 다압면 쪽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금 50이 훌쩍 넘은 세대들은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강 건너 광양 다압 항동나루에서 전라도쪽 학생들이 건너와 악양중학교로 통학을 하던 것을 기억한다. 섯바구는 ‘삽암’ 즉 꽂힌 바위라는 뜻이다. 주민들은 섯바구라 하기도 하고 선바위(입석)라고도 한다. ‘섯바위’란 말에,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르다. 바위에는 취적대라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섶바위에 불을 지르자 대나무가 타고 생솔이 연기를 뿌리고, 왜적은 치어죽고 맞아죽고 

섯바구는 원래 섶바위라 불렸단다. 옛날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관군은 섬진강가의 여러 바위에 섶나무를 잔뜩 쌓았다. 밑에는 짚을 깔고 근처의 생솔가지를 위에 덮었다. 다음은 굵은 대나무와 산죽을 잔뜩 쌓아올려 ‘왜놈 오거라’고 벼르고 있었다. 바위와 기둥뿌리 같은 소나무를 베어 놓고, 긴장하며 기다렸다. 때가 왔다. 왜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쫘악하니 기름을 붓고 냅다 섶나무에 불을 질러버렸다. 엄청난 연기와 함께 섶나무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생솔가지가 푸드득 푸드득 타오르고 지천이 연기로 자욱했다. 대나무가 “꽝꽝 뻥뻥”하며 온 산과 섬진강을 때려 부수듯 터지기 시작했다. ‘충격과 공포’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왜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이때를 놓칠 새라, 고소성에서 기다리던 관군들은 일제히 바위를 굴리고 활을 쏘고, 돌멩이를 던지고 거목을 구르기 시작했다. 시퍼런 일본도를 들고 사무라이라며 기세등등하던 놈들이 제일 먼저 깔려죽고, 창을 든 뒤 옛 왜병들이 도망가다 밟혀죽고 치어죽고 머리가 터지고 살이 찢어지고, 놀라 자빠져 죽었다. 결국 왜적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왜 자꾸 쳐들어 오냐구.

◆한유한이 섯바구에서 낚시질 하는데, “왕이 오래요”하며 사신이 뒤에 섰는데 

[악양의 한유한]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 섯바구 나루터 위쪽 강가는 고려 말의 선비로 전설적인 인물인 녹사 한유한 선생이 은거하면서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말 충신 정몽주와 동문수학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혼란기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악양면 외둔마을에 거주했다 한다. 화개 청암 등에도 한유한의 이야기가 있고, 산청군 등지에서도 한유한의 이야기가 전해져, 한유한은 이 일대에선 상당히 유명한 기인이다. 어느 날 한유한이 강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채 졸고 있는데, 임금이 보낸 칙서를 들고, 사신이 찾아왔다. “신이 아는 게 없어 왕명을 받을 수 없소.” 그리고 한유한은 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사신이 집을 찾아가보니 한유한은 이미 도망을 친 뒤였다고 한다. 그가 사라진 방 한쪽 벽에는 한편의 시가 적혀있었다. ‘한 조각 사륜이 산골짝에 날아드니 비로소 이름이 세상에 알려짐을 알았네’란 짧막한 시 한 수였다. 한유한 장차 나라가 소란스러울 것을 예견하고 가족을 데리고 지리산에 은거한 은둔자였다.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고, 최치원 급의 신선이 됐다고도 한다. 가만히 보면, 신선이 됐다는 것은 엄청난 내공을 가진 조상들에게 후손들이 내려주는 최고의 찬사 같다.

◆이순신 장군, 악양과 화개를 비를 맞으며 지나친 뒤, 그리고 그 위대한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백의종군하기 위해 임지로 가던 이순신 장군은 악양을 최소 두 번은 지나쳤다. 하룻밤을 묵은 기록이 있다. 모두 ‘비가 왔다’는 기록과 함께였다. 1579년 5월27일, 구례를 떠나 악양에서 자고, 8월3일 삼군통제사로 임명받고, 화개에 이르렀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그에게 일본은 파렴치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그는 정치적으로 ‘잼병’이었고, 묵묵히 맡은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었다. 군사를 잃을 것 같으면 왕명도 거부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해서 그는 위태위태한 영웅이었다. 이런 일로, 사형의 순간까지 가지만 가까스로 구원된다. 영웅이지만 한낱 백성의 신분으로 전쟁에 다시 나아간다. 이것이 백의종군이다. 이즈음은 원균이 왜군에 참패해 조선수군은 멸망할 지경에 이른 시점이다. 악양을 따라 간 뒤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수군을 없애자는 조정의 논의에 ‘신 이순신에게 전함 13척이 있습니다’란 장엄한 장계를 올리기도 한다. 이 13척으로, 왜선 333척과 맞붙어 31척을 대파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장군은 5월 중순, 구례 화개를 거쳐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악양에 닿았다고 했는데, 이곳 섯바구 앞을 지나 악양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난중일기 악양 부분에 ‘악양에 닿았을 때는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옷을 말려야 했다’고 썼다. 처연하고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8월3일 삼군통제사로 임명되고, 하동 원동에 도착하고 아침밥을 먹고 쌍계동(화개면)에 이르니 갑자기 온 비에 냇물이 불어 어렵사리 건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에게 악양과 화개는 ‘비’로 기억되는 땅이었다. 백의종군 때 악양을 지나고 4개월 뒤, 화개를 지나면서 1개월 뒤에 명량대첩이 있었다. 최악의 조건에 최대의 성과를 올린 너무도 위대한 전투였다.


□1597년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 행로지

5월 26일(양력 7월 10일) 
비가 종일 억수같이 쏟아져 고생고생 끝에 악양 땅에 도착했다. 이정란(악양면 평사리)의 집에 들려 하룻밤 묵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차남 울을 시켜 간청해 겨우 하룻밤 신세를 졌다. 행장이 비에 흠뻑 젖었다.
5월 27일(양력 7월 11일) 
젖은 옷을 말려입고 저녁나절에 하동현 두치(광양군 진상군 삼거리이거나 다압면 섬진리로 추정)에 도착해 최춘룡의 집에 머물었다.
5월 29일(양력 7월 13일)
몸이 불편해서 길을 떠날 수 없어 그대로 현감의 성 안 별채에 머물러 몸조리를 한다. 현감이 퍽 호의적인 이야기를 했다.

※4개월의 백의종군 기간 중 충무공은 16일간을 하동에서 머물렀다. 이중 12일간을 옥종에서, 나머지는 악양과 화개 하동현이었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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