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접사(接寫)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접사(接寫)
  • 하동뉴스
  • 승인 2023.04.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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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接寫)

                                        이잠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
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
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던 털 난 짐승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
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
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
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
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
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
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
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
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
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
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시집 『늦게 오는 사람』(파란, 2023)

【시인 소개】
이잠 / 충남 홍성 출생. 1995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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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옛집이 허물어진다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찍어서 남기고 싶다면 무엇을 찍을까요? 엉뚱하게도 시인은 “안방에 살던 거미”를 찍습니다. 특별히 그 거미하고 친했던 것도 아닌데, 하필 그 거미만 접사(接寫)합니다. 접사란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 걸 말합니다. 무엇을 접사하는 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가 접사할 만큼 소중했던 게 그 거미였을까요? 
가끔 나를 놀라게 하던 쥐며느리, 느닷없이 내 엉덩이를 낚아채던 마루의 삐죽 솟은 못대가리, 절망으로 한숨짓던 골방, 그 방에서 바라보던 별빛, 저녁밥 먹는 가족들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 등 오랫동안 살았던 옛집이라면 사소하지만 소중했던 추억들이 무수히 많겠지요. 그런데 시인은 털 난 거미만 찍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사랑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사랑하는 것들은 어쩌지 못하고, 엉뚱한 것들에다 마음을 쏟지요. 누구에게나 이런 사진 한두 장은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클로즈업된 게 없어서 단체사진에서만 조그맣게 보아야 하는 추억 속의 사진.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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