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
  • 하동뉴스
  • 승인 2023.07.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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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

                                                                  정규화

지하실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노숙을 생각해 봤지만
노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이다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오늘 몫의 명상에 잠긴다
죽음도 이렇게
편안하고 조용하게 오는 것일까
외로움에 잔뼈가 굵어진 몸이라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고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시집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불휘, 2003년)

?【시인 소개】
정규화 / 하동 옥종 출생. 1981년 창작과비평사 신작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으로 등단. 시집 『농민의 아들』 『지리산 수첩』 외 다수. 경남작가회의 초대회장 등 역임. 경남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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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화 시인은 1949년 옥종면 위태리 상갈티 마을에서 태어나서 2007년 타계했습니다. 아버지는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큰아버지마저도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떴습니다. 연좌제에 걸려 밥벌이도 쉽지 않아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여 진주, 마산, 창원을 전전하며 생활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신장이 망가져서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해야 했지요. 그러다보니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시인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어갔습니다. 이 시는 그러던 시절의 어느 날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슬이나 피하려고 “지하실 맨바닥에/신문지를 깔고”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노숙과는 비교할 수 없는/고급”이라고, “외로움에 잔뼈가 굵어진 몸이라/아무런 불편함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오늘밤은 이렇게/축복을 받고 있다”고 당신의 주님에게 감사를 올리지요. 좋은 시는 ‘잘 표현된 불행’이라고들 하지만 그의 시는 ‘표현’조차 버거워서 차라리 비명에 가깝습니다. 이런 탓에 그의 시집을 읽는 동안 가슴이 저리다 못해 아렸습니다. 늘 그렇듯이 시의 감동은 시인의 처절한 고통을 먹고 자라나 봅니다.

(김남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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