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반려(伴侶)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반려(伴侶)
  • 하동뉴스
  • 승인 2023.07.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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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伴侶)

                                    이지희


밤을 만나면
벽은 힘을 낸다

기대는 것들의 통증을 껴안느라
실은 벽도 앓고 있으나,
풋내 나는 햇살로 단장하는 창보다
고장 난 숨들의 하중을 있는 그대로 견디는 벽이
질박하고 단단하다는 걸
밤은 잘 안다
벽이 미더운 자들이
무장을 풀고 실컷 앓을 때
밤은
구겨진 등과 벽의 실루엣을 쓰다듬는다

허기진 그림자들이 벽의 망막 속에서
봉합되고 있다


- 계간 《사람의 문학》(2023년 여름호)


【시인 소개】
이지희 / 2018년 《시인시대》 등단. 방송시나리오 작가.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품선정 수혜. 2023년 대구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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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절망은 가깝다. 하여 어둠이 쌓인 밤과 절망이 기대는 벽도 역시 가깝다. 그래서 “밤을 만나면/벽은 힘을 낸다”. 벽은 밤이 미덥고, 밤은 벽을 이해한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묵묵히 동행하는 관계를 반려(伴侶)라고 한다면 밤과 벽은 좋은 반려이다.
자기를 믿고 기대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무너지는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는 벽이, “풋내 나는 햇살로 단장하는 창보다” “질박하고 단단하다는 걸/밤은 잘 안다”. 한마디로 밤은 창문이라는 ‘섣부른 희망’이 아니라 벽이라는 ‘미더운 의리’를 더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벽이 미더운 자들이/무장을 풀고 실컷 앓을 때”, 밤은 그들의 “구겨진 등”과 그들을 껴안고 있는 “벽의 실루엣”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무장을 해제하고 벽에 기대어 밤을 실컷 앓은 자들이 절망과 아픔을 딛고(“벽의 망막 속에서/봉합되고“) 다시 아침을 맞아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밤과 벽은 창문과 햇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뒤로 물러난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동맹’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위한 ‘동행’일 때 우리는 반려(伴侶)라고 부른다. 그래서 ‘반려’라는 말 속에는 손을 잡고 어둠속을 헤쳐 가는 ‘짝’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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