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짧은 죽음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짧은 죽음
  • 하동뉴스
  • 승인 2024.01.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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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죽음

                                    유자효


영화 ‘쿼바디스’에서 보았다.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
사자 무리에 맞서
공포에 떠는 기독교도들에게
나이든 여성이 달래는 말
“두려워 마요. 금방 끝날 거예요.”
이때의 죽음은 자비
빨리 끝내주는 것이 은혜가 되는,
절망적인 병과 마주섰을 때
고통과 공포에 떠는 환자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주 서야 할 시간에
연약한 영혼을 달래주는 것은
최후의 은총
짧은 죽음.

-시집 『시간의 길이』(서정시학, 2023)

【시인 소개】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성자가 된 개』 『아직』 『시간의 길이』 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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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머빈 르노이 감독이 만들어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재개봉한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가 황후의 사주를 받아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내용입니다. 처형방식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기독교도들을 가두어놓고 사자를 풀어서 잡아먹히게 하지요. 이 시는 바로 그 처형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떠는 기독교도를 향해 한 여인이 다독이듯이 말합니다. “두려워 마요. 금방 끝날 거예요.” 공포의 대상이 사라져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금방 죽음을 맞게 될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끔찍한 위로입니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라 죽음을 서둘러 맞는 일이라는 처절한 진실.
그때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맹수 사자(獅子)에게 쫓기지만 지금의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승 사자(使者)에게 쫓기며 삽니다. “모두 언젠가는 마주 서야 할 시간에” 우리를 달래주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유효한 것은 금방 끝난다는 말,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 아닐까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지요. 문학과 예술 그리고 종교가 늘 우리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음과 맞서라고.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행복하라고.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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