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지 에이 피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지 에이 피
  • 하동뉴스
  • 승인 2024.02.06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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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에이 피

                                        임채성

지나치듯 슬몃 본다
백화점 의류매장
명조체로 박음질한 GAP상표 하얀 옷을
누구는 ‘갑’이라 읽고
누군 또 ‘갭’이라 읽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갑이 있고 갭이 있다
아무런 잘못 없어도 고개 숙일 원죄 위에
쉽사리 좁힐 수 없는 틈새까지 덤으로 입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갑의 앞에 서야 한다
야윈 목 죄어오는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오늘은
지, 에이, 피를
나도 한 번 입고 싶다

- 계간 《시조시학》(2022년 겨울호)

【시인 소개】
임채성 / 경남 남해 출생.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시선집 『지 에이 피』 등이 있음. 정음시조문학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신인상, 한국가사문학대상 등 수상. 현재 〈21세기시조〉 동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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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류 브랜드 중에 ‘GAP’라는 게 있나 봅니다. 백화점 의류 매장에 입점해 있는 걸 보면 꽤 고급브랜드에 속하는 듯하네요. 이 시는 의류가 아닌 “명조체로 박음질한 GAP상표”명에 주목합니다. ‘gap’을 영어로 읽으면 ‘갈라진 틈이나 간격, 차이’ 등을 뜻하는 ‘갭’이라고 읽겠지만, 외국어 표기법으로 읽으면 ‘갑’이라고 읽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갑(甲)을 ‘십간(十干)의 첫째’나 ‘계약상의 우위에 있는 자’가 아닌 ‘갑질’로 이해합니다. ‘갑’은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상사’나 ‘진상 고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얼마나 직장에서 갑질에 시달렸으면 의류매장의 상표를 보고도 ‘갑’을 떠올렸겠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갑의 앞에 서야”하는 을(乙)들은 “아무런 잘못 없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고개 숙일” 수밖에 없지요. 지시하고 지시받는,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그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틈, 즉 갭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갭은 틈이고, 틈은 거리입니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삭막해지고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는 건 ‘거리’가 아니라 ‘밀착’일 것입니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유대와 연대가 없다면, 공동체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리 값비싼 ‘GAP’을 껴입어도 우리는 추울 겁니다. 참고로, 오늘은 시가 아닌 시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지난 2021년 ‘한국문학진흥법’이 개정돼서 시조가 시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장르가 됐습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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