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애월, 서투른 결심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애월, 서투른 결심
  • 하동뉴스
  • 승인 2024.02.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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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서투른 결심

                                               서안나


슬픔은 소주잔처럼 손잡이가 없어서 캄캄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결로 흩어졌다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찬술을 마시고
아버지는 북극처럼 혼자 춥다

습자지처럼 뒤돌아보면 자국만 남는
슬픔은 그런 것이다

봄날 새벽
나도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본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병만 남은 사람의 몸은 고요하다
병 속에 바람이 흘러나온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애월을 걸으면
물빛이 아버지의 눈빛과 닮았다
당신을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서투른 결심을 한다

-시집 『애월』(여우난골, 2023)

【시인 소개】
서안나 / 제주 출생. 1990년 《문학과 비평》에 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애월』,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등이 있음. <서쪽>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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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첫줄을 읽는 순간, 뭉클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슬픔과 소주잔과 손잡이와 캄캄함이 빚어내는 정서가 문장을 벗어나서 독자에게 어떤 실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슬퍼하며 혼자 통음(痛飮)을 합니다. 피는 술보다 진해서,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술로 달래질 수는 없습니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또 슬퍼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은 놓여 있는 지점이 달라서 같은 슬픔일지라도 그 각도와 심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봄날 새벽” 딸은 자신의 슬픔을 겨워하며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바라봅니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 있”습니다. 딸은 아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이 고통스러워서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아버지를 뒤돌아보며 기꺼이 아파할 것입니다.
시인은 아파서 시를 쓰게 되고, 시를 쓰면서 한 번 더 아픔을 겪습니다. 독자는 시인의 아픔에 자신의 아픔을 포개어서 읽고 거기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는 쓰는 자를 진통(鎭痛)하고 읽는 자를 위무(慰撫)합니다. 아픈 세상일수록 시가 더 필요한 까닭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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