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 출간
[특집]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 출간
  • 하동뉴스
  • 승인 2024.03.1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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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주지 영담스님)는 불국사 학장을 역임하신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를 출간했다고 밝혔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는 국보 제47호로, 쌍계사 창건주이신 진감 혜소慧昭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로, 887(진성여왕 1)년에 세워졌다. 선사의 속성은 최 씨로, 804(애장왕 5)년에 당나라로 가서 신감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고, 830(흥덕왕 5)년에 조계육조선사의 법맥을 잇고 신라로 돌아와, 신라의 다섯 임금, 흥덕대왕(826-836재위), 민애대왕(838-839재위), 문성왕(839-857재위), 헌강왕(875-886재위), 정강왕(886-887재위)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지금의 쌍계사인 옥천사에서 입적했다. 헌강왕은 885년에 혜소스님에게 진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감선사대공영탑이라는 탑호를 내려 탑비를 세우도록 했다. 이 비석의 글은 왕명으로 최치원이 짓고 쓴 사산비명四?碑銘 가운데 하나로, 당대의 문장 연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국내 최초의 진감선사대공영탑비 완역과 강의

이번에 쌍계사에서 출간한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전해졌던 비문의 내용 전체를 최초로 완역하신 것으로, 불교사와 당시 신라 시대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을 것이다. 진감선사대공영탑비문은 그동안 일반인들은 물론 학자들에게도, 난해한 한문으로 전해져서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일해 덕민스님은 이 어려운 비문을 원문과 함께 직역하고 평설을 통해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강의하였다.

-중창주이신 고산 혜원대선사의 뜻을 기려야 

특히 일해 덕민스님은 강의를 통해, 쌍계사 개산조사인 삼법대비화상과, 창건조사인 진감선사와 함께 중창조사인 서산, 벽암, 백암, 용담선사와 고산 혜원대선사를 조석예불에 포함해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쌍계사 중창주이신 고산 혜원대선사께서는 1975년 삼신산 쌍계산문에 들어오시어 입적하실 때까지 46년간 주석하시면서 폐허에 가까웠던 쌍계사를 일신하셨다. 또한 선사님께서는 불식촌음(不息寸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것을 고산가풍으로 세우고, 쌍계사 창건이념인 선, 교, 율, 차와 범패의 사상을 실천하며 한평생을 보내셨다.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三法), 대비(?悲) 두 스님이 중국 선종의 6대조인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모시고 설리갈화처(雪裏葛化處), 즉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정상을 봉안하여 선종대가람의 선풍을 개산하였고, 828년에는 대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차나무 씨를 가지고 와서 왕명으로 처음 지리산 쌍계사 화개 골짜기에 심게 하였다. 쌍계사 화개곡에는 차나무 시배지가 있는데, 경상남도에서는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 밭으로 인정하여 1987년 8월 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61호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로 지정하였다.  

이어서 통일신라 840(문성왕2)년에 진감혜소(眞鑑慧昭)선사가, 육조혜능조사의 선법을 잇고 귀국해 삼법, 대비 두 화상께서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곳에, 조사의 영당影堂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泉寺라 하여 창건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선, 교, 율, 차와 불교음악인 범패를 가르쳤다. 그리고 고산혜원대선사께서 쌍계사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다음은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에 나오는 주요 내용이다. 

-최치원의 기록으로 쌍계사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다

쌍계사 주지 영담스님과 일해 덕민스님은 이번에 출간한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를 통해,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 중창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치원이 지은 비문의 기록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조계종 종조인 도의국사와 만남

진감혜소선사는 서기 810년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이후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고향인 신라에서 먼저 온 도의선사를 만났다고 한다. 진감혜소선사는 도의선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서남쪽에서 벗을 얻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이신 도의선사와 중국에서 함께 수행을 하셨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도의선사가 신라에 먼저 귀국하고, 삼 년 뒤인 830년에 진감선사가 귀국하니, 흥덕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도의선사가 귀국을 하고, 진감선사가 이어서 귀국을 하니, 두 분의 큰스님께서 신라에 불교를 꽃피우고, 국왕을 도와서 불국토를 건설하는 데 앞장 서 달라”고 부탁하였다.

-쌍계사가 별천지 무릉도원

최치원은 비문에서 쌍계사를 묘사하면서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라고 한다. 이것은 호로병 가운데 별천지가 쌍계사라는 것으로, 쌍계사가 별천지 무릉도원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쌍계사는 봄 계곡에는 꽃이 화려하고, 여름에는 우거진 소나무 소리에 울려 퍼지는 비파소리가 있고, 가을 골짜기에는 달이 휘영청 밝고, 겨울에는 산묏부리에 눈이 쌓여있다고 했다. 따라서 별천지는 지리산 화개 골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쌍계사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 최치원의 비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최치원은 또 “화개동花開洞”이라는 시에서, “동국화개동(東國花開洞)에 호리병 속의 별천지가 있다.”고 쌍계사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조계의 현손은 진감선사

최치원은 비문에서 “굴지법윤(屈指法胤)하면 즉선사(則禪師)는 내조계지현손(乃曹溪之玄孫)이라.”고 했다. 이 말은 진감선사의 법윤, 즉 법의 서열을 가리켜본즉, 선사는 조계 육조스님의 현손이라는 말이다. 즉 남악회향, 마조도일, 창주신감으로 이어지는 육조스님의 법을 이었다는 것이다. 조계의 현손, 즉 육조스님의 법을 이었다는 표현이 신라시대 887년에 최치원에 의해 최초로 기록된 것이다. 오늘날 조계종의 종조는 도의선사이지만, 이미 신라시대에 진감선사가 조계의 현손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우리 조계종단에서는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쌍계사로 하라!

헌강왕이 죽고 886년 7월에 정강왕이 즉위하는데 정강왕은 이웃 산에 옥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으니, 다시 이름을 지으라고 명을 내였다. 그리고 문 앞에 두 개의 시내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쌍계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이미 1,200여 년 전 신라시대에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건하게 된 것이다.

-일해 덕민스님 소개

책을 지으신 일해 덕민스님은 1954년 범어사에서 우룡 종한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68년 범어사에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청암사 승가대학에서 수학을 하셨으며, 1967년에서 1969년까지 흥국학림에서 호경스님 하에 경학을 연찬하던 중 1968년 청암사에서 우룡스님께 전강을 받으셨다. 1970년부터 1986년까지 마지막 유학자 추연선생 문하(태동고전연구원)에서 공부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범어사 승가대학 학장,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불국사 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현재, 기림사 성림금강학림 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일해 덕민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강의’는 도서출판 반야샘(032-663-7771~5)에서 출판했다. 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 제공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84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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