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복희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복희
  • 하동뉴스
  • 승인 2024.03.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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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


                                    남길순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 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가 없다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2024)


?【시인 소개】
남길순 / 전남 순천에서 태어남. 2012년 《시로여는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분홍의 시작』, 합동시집 『시골시인 Q』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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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조용한 호숫가에 산책을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 소녀가 맹도견(盲導犬) “복희”와 함께 산책하고 있습니다. 잠시 쉬고 있던 소녀가 일어서며 “복희야” 하고 부르자 “차가운 바닥에 앉아/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섭니다. “개가 걷고/소녀가 따라 걷”습니다. 인기척을 느끼고 소녀는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며 길을 비켜줍니다.
볼 수 없는 소녀에게 풍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 겹씩 결로 다가와/기슭에 닿고” “희미한 달이 떠 있”지만 소녀는 이 그림 같은 호수의 풍경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바람결을 느끼고 인기척으로 주위를 인식할 뿐입니다. 볼 수 있는 개와 볼 수 없는 소녀가 한 몸이 되어 고요한 산책을 즐깁니다.
보는 자와 보임을 당하는 자, 지시하는 자와 지시를 받는 자로 나뉜 이 세상은 종종 시선과 소리의 폭력에 시달립니다. 시각이 사라지고 소리를 지우면 차분하고 정적(靜的)인 세계로 바뀝니다. 한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생겨나고, 그 감각이 감지한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지요. 맹도견 복희가 안내하는 호숫가의 세계는, 눈부심과 아우성 속에서 우리가 상실했던 고요의 본래모습일 것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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