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판사 출신 엿장수
노년의 고동소리-판사 출신 엿장수
  • 하동뉴스
  • 승인 2019.04.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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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고 싶은 일이 막히고 형세가 답답할 때 마땅히 그 첫 마음 자리를 돌이켜 다시 살펴야 한다. 큰 공을 이뤄 세상에 우쭐하고 싶은 사람은 마땅히 그가 가야할 마지막 길을 미리 살펴야 한다. 엿판을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삼천리 방방곡곡을 3년 동안 떠돌며 목숨 줄을 이었던 엿장수 이찬형(李燦亨).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양덕,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나왔다. 주요 경력은 평양 복심 법원 판사. 요즘으로 치면 고등법원의 중견 판사였던 셈이다.

법학도 이찬형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곧 일제 치하에서 법관 시험을 통해 어려움 없이 판사가 되었다. 그는 일제 통치하의 민족 차별적 인사운영 시스템에 따라 6년간이나 정규 법관 보조 역할만 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 본 일제는 드디어 이찬형에게 복심 법원 판사 자리를 주었다. 그 때가 1920년, 그의 나이 33세.
 
일제가 이찬형을 복심 법원 판사로 임명한 것은 간악한 그들의 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6년간 그들 치하의 법조계에 몸을 담았던 이찬형을 이제 그들 사법부의 일원으로 뼈가 굳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그를 한민족 탄압의 선봉에 세워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법정에서 끌려온 독립운동가들을 재판하게 했다.
 
일제 사법부의 목적은 오직 한민족 간의 이간질이었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일제 헌병과 경찰들에 체포당해 법정에 끌려온 애국지사들에 대한 재판을 이찬형에게 맡겨 형벌을 내리게 했던 것이다. 이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 적개심을 품게 하는 지극히 ‘일본인’다운 얄팍 교활하고 비굴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제 사법부는 잘못 짚었던 것이다.

이찬형은 아무리 그들 사법부의 중진에 들었다 해도 결코 일제에 빌붙은 부일배(附日輩)는 아니었다. 법정에서 민족을 위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애국지사들의 의연한 눈빛을 이찬형 판사는 외면하질 않았다. 급기야 양심이 찔리기까지 했다. 이찬형 판사는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홀연히 종적을 감춰 버렸다. 일제가 한참 뻗어 나갈 무렵인 1923년의 일. 그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돌이 갓 지난 딸을 남겨 두고 정처 없는 방랑길에 들어섰다.

이찬형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다가 서울 남대문 시장에 다 달았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입고 있던 신사복과 구두를 벗은 후 주는 대로 값을 쳐서 받고 팔았다. 그는 엿장수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엿을 도매로 파는 데를 수소문하여 찾았다. 지게에 엿판을 얹어 짊어지고 벙거지로 이마를 가리니 완벽한 엿장수였다. 3년간 떠돌며 엿판 돈으로 목숨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생명 줄인 엿판을 짊어 진채 땀을 흘리며 강원도 대관령을 넘게 되었다.

대관령 고갯길에서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그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세상을 찾은 듯 마음이 달라졌다. 운명이었다. 드디어 판사 출신 엿장수 이찬형은 스님의 바람대로 사문(沙門)의 길에 들어섰다.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석두화상(石頭和尙)을 만나 계(戒)를 받고 머리를 깎았다. 그 때 나이 서른여덟. 출가 치고는 늦은 나이였다. 이찬형은 비로소 할 일을 찾았다는 듯 용맹 정진하였다.

타고난 명석한 두뇌로 열심히 수도에 매달렸다. 결과 이찬형이 한국 불교계의 거목으로 우뚝 솟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질 않았다. 마침내 조계종 종정에 오르고 1962년 통합 종단의 초대 종정에 추대 되었다. 곧 한국 불교의 상징적 인물 효봉(曉峰) 선사였다. 그는 1966년 10월, 밀양 표충사에서 단정히 앉은 자세로 입적 했다. 속수 80년. 찬란한 생애였다.   ㈔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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