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 소리] 나라를 건진 ‘친구’
[노년의 고동 소리] 나라를 건진 ‘친구’
  • 하동뉴스
  • 승인 2019.05.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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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려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믿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일가친척, 피를 나눈 형제라도 생활 반경이 다르면 일상에서 멀다. 돌이켜 보면 ‘친구’ 덕으로 잘 지냈던 인연에 갚음을 못해 늘 빚진 느낌이다. 넉넉하면 주변 시샘을 무릅쓰고라도 갚는 게 도리지만 사는 게 힘겨워 안타깝다. 민초가 감히 들먹일 바는 아니지만 옛날 중국 제나라 때 관중 · 포숙아 못지않게 우리 역사에도 교훈이 되는 ‘친구’이야기가 있어 눈물겹다.
 
임진왜란 극복에 온몸을 바친 문충공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은 한 마을에 살았던 어릴 때 ‘친구’였다. 그들이 살았던 한양 건천동은 오늘날의 서울 중구 인현동이다. 충무공은 몰락한 선비 이정(李貞)의 아들이었고, 유성룡은 오늘날의 도지사 격인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이 아버지였다. 나이 세 살 위인 유성룡은 집안 형편이 이순신에 비해 월등했다. 두 소년은 한 골목에서 노는 ‘친구’였지만 성격이 달랐다. 유성룡은 학구적이라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대과에 올라 벼슬길에 들었지만, 이순신은 또래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즐겼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활을 쏴 아이의 눈을 멀게 해버린 일로 악동(惡童)으로 이름이 났다.  하지만 충무공 행록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공은 사교에 서툴러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유성룡 만이 한 동네에서 어려서부터 사귀어 매양 그의 장수 될 만한 인품을 칭찬했었다.” 충무공은 32세 늦은 나이로 무과에 올라 변방 하급 장수로 관계에 들었으나, 강직한 성격에 고집스럽고 내성적이라 벼슬에서 늘 뒤쳐졌다. 그리하여 두 ‘친구’ 간의 신분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됐다. 유성룡은 41세 나이에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올랐고, 충무공은 훈련원 참군으로 임금 행차 길에 창을 비껴들고 따르는 호위군사에 불과 했다.

유성룡이 승진을 거듭, 육조의 선임 예조판서였을 때 우연히 무관직 정7품 이순신을 만났다. 유성룡은 ‘기회다’싶어 이순신의 소매를 잡고 진심으로 말했다. “율곡 대감을 한번 만나 보오!”. 율곡 이이(李珥)는 덕수 이 씨 이순신과 종친으로 나이는 이순신 보다 아홉 살 위였으나 조카뻘이었다. 그 때 율곡은 조정 인사권을 거머쥔 이조판서라, 미 관 말직 한사람 쯤 챙겨 줌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히 마다했다. “내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의 심상(心象)에 흠이 될 것이오!”. 율곡은 왜란 발발 8년 전에 48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율곡은 전날 유성룡에게 일렀었다.

“공은 이순신을 잘 알고 있는 줄 아오! 그가 장차 나라를 구할 인물로 보이니 중용하시오!”. 왜란을 예견한 유성룡은 율곡이 했던 말을 귀담아 뒀었다. 전쟁 기운이 짙어지자 유성룡은 정승에 올랐고, 이순신은 겨우 종6품으로 지방 수령 최하위 정읍현감이었다. 유성룡은 비상시국에 대비, ‘친구’ 이순신을 과감하게 발탁, 앞 뒤 따지질 않고 다섯 등급을 올려 이순신을 당상관인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 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을 비롯한 유성룡 정적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곧 터진 왜란을 맞아 이순신은 승전을 거듭, 정적들의 불만을 눌렀다. 탁월한 능력으로 이순신은 바다를 누비며 왜적을 깨뜨렸다. 왜란 말기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교활한 왜적 꾐에 빠진 모자란 군주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 묶어 죽이려 닦달 했다.

유성룡은 기가 막혔다. 임금에게 빌붙어 유성룡과 이순신을 시샘하는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했다. 자신이 이순신을 편들면 오히려 ‘친구’의 황천길을 재촉하는 꼴이 될게 뻔했다. 두 사람이 어릴 때「친구」였음은 천하가 아는 바였다. 유성룡은 은밀히 좌의정 정탁(鄭琢)에게 매달려 이순신을 살릴 길을 찾게 했다. 이순신은 살아났다. 초죽음이 되어 살아난 이순신은 골병이 든 몸을 이끌고 유성룡을 찾아 머리를 숙였다. 유성룡은 ‘친구’의 몰골을 보고 하늘을 원망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 세계 전쟁사에 볼 수없는 명량 대첩으로 나라를 건졌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순국하던 그 날, 영의정 유성룡도 정적들 농간으로 파직 당해 버렸다. 먼 훗날 숙종대왕은 현충사를 짓고 이순신을 이렇게 기렸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 예부터 있지마는, 제 몸 죽어 나라 살린 이 이분에서 처음 보네!”라며 말했다는 것이다. 두 인물은 차원이 다른 ‘친구’였다.   ㈔대한노인회 하동군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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