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 소리] 공산주의
[노년의 고동 소리] 공산주의
  • 하동뉴스
  • 승인 2019.06.11 0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칼 맑스와 엥겔스가 함께 지은 혁명적선언문이었다. 맑스 탄생 200주년 및 ‘공산당 선언’ 170주년 기념으로 2018년에 나온 소책자였다. 심철민 서울대학교 강사가 번역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노년들은 공산주의라는 환상이 만든 고통 속에 살았고 살고 있다. ‘공상당 선언’에는 꿈같은 솔깃한 말이 담겨 있었다. ▲토지를 국유화한다 ▲높은 누진세(累進稅)를 적용한다 ▲상속권을 폐지한다 ▲모든 반역자들 재산은 몰수한다 ▲은행 금융을 국가가 장악한다 ▲유통 기능을 국가가 독점한다 ▲국영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하며, 공동으로 토지를 개척한다 ▲모두에게 동등한 노동의무를 부과하고, 농업을 위한 산업 군을 설립한다 ▲농업과 타 산업의 결합을 도모하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인다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아동 공장노동은 철폐하며, 교육과 물질적 생산을 결합 시킨다.

문제의 선언은 1847년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대회 강령으로 만들어져 1882년 1월 러시아어 판으로 런던에서 출판된 게 처음이다. 그 선언문이 근대 자본가 계급의 토지소유 붕괴를 부추겼다. 맑스는 “러시아의 토지 공유제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광복 직후 미군정 때 등록된 한국 최초 합법정당은 공산주의자 박헌영(朴憲永)이 조직한 ‘조선 공산당’이었다. 서울에서 여론조사를 해보니 한국 지도자 깜 1위가 박헌영이었다. 이승만은 여운형· 김구 보다도 훨씬 아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러시아 공산집권자 레닌에게서 자금을 받아썼다. 당시 한국 국민 70%가 땅을 못 가진 농민이었다. 지주들 땅을 빌려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 생산량 절반을 지주에게 바쳤다. 뒷 해에 땅을 다시 빌리려면 지주에게 갈치꾸러미 쯤을 안겨야 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신(神)이 된 것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 줬기 때문이다.

맑스의 사상에 영향을 준 영국 사상가 ‘오언’은 공동생산 · 공동분배라는 이상(理想)을 펼쳐 보고자 추종자 900여명과 함께 1825년 미국 인디아나에 ‘뉴 하모니’라는 공동체사회를 건설했다. 그러나 3년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동물이 아닌 인간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죽이는 장치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사상적으로 이상적이나 현실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설파했다. 나는 옛날 지방유지 한분에게 “하동이 두 달 동안 적 치하에 있었는데, 그 때 뭘하셨느냐?” 고 물었다. 그는 “군 인민위원회에서 읍·면에 토지분배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라며 출장을 보내기에 금남면에 나갔었다!”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대한민국에 공산주의라는 먹구름이 걷혀진 것은 참으로 하늘이 돌봐 준 기적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맑스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네델란드인 어머니를 둔 유대인이었다. 영국으로 피신하여 평생을 철학과 역사공부에 매달렸다. 생계 능력이 없어 자녀 여섯 가운데 셋이 굶어 죽었다. 언젠가 영국 런던에서 시내 구경을 하는데 안내원이 길가 벽돌 건물 2층을 가르키며 “저기가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집이다” 했다. 감회가 색달랐다. ‘공산당 선언’ 마지막 구절은 “만국의 프로레타리아(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맑스는 노동운동 지도자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883년 66세로 죽어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그 때 우리나라는 고종 20년, 그 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전국에 반포했다. 한반도에는 국민 662만8587명이 살았는데 대부분이 농노(農奴)처럼 살았다. (사)대한 노인회 하동군 지회장 정연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