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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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19.06.2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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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성인께는 정해둔 마음이 없다

◆내가 나를 바로 보고자 밝히는 것

(自知者明 자지자명이라)

知人者智(지인자지)

自知者明(자지자명)

남을 아는 것은 슬기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음이며. 노자 33장 참조

밤에는 두 손으로 등불을 들고 낮에는 마음속에 등불을 켜라. 이제는 이런 말이 어른들의 입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광명 중에서 광을 낮추고 명을 높였다. 어디 가서든 광내지 말고 한 발 물러서서 다투지 말라고 집 나서는 자식에게 애비는 타이르곤 했었다. 옛날 학동들은 서당의 하초는 훈장의 것이고 사랑방 하초는 엄부의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하초란 나아 이름이 아니고 회초리를 말한다. 매끈한 싸릿대 회초리를 하라 하고 고슴도치 등 같은 엄나무 작대기를 다듬어 울툭불툭 거친 회초리를 초라고 한다. 좀 잘못했으면 하로 종아리를 맞고 크게 잘못했으면 초로 종아리를 맞아 피멍이 들기도 했다. 물론 밖에 나가 버르장머리 없다는 말을 듣는 자식에겐 서슴없이 아버지가 초를 들었다. “이놈아. 낮일수록 마음속에 등불을 켜라는 자명을 잊었단 말이냐?” 호통 치는 애비는 초로 자식을 회초리질하며 울먹였다. 이럴 때는 어미도 제 자식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마음에 등불을 켜라. 이를 자지의 명이라 한다. 내가 내 마음을 밝힘이 자명이다. 속으로 밝힘을 일러 명이라 하고 밖으로 밝힘을 일러 광이라 한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광내고 때 뺀다는 말이 유행을 탔다. 하도 살기가 어렵다 보니 기죽기 싫어서였는지 너도 나도 눈부시게 자신을 과시하는 세태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명할수록 못난이로 밀리고 만다는 속셈이 바람을 탔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손에 하초가 들려지기는커녕 점점 자식들의 눈치 보는 세상으로 틀어져 급기야 아버지는 자식을 사람답게 길러내는 조련사 구실을 내려놓게 되었다. 비록 하초를 손에 내려놓았을지언정 자식의 귀에 듣기 싫은 소리마저 그만둔 것은 아니었는지라 자식들은 제 애비를 ‘꼰대’라 부르고 쇠귀에 경을 읊어보라는 듯 제멋대로 자라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선한 사람인가, 선하지 못한 사람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 즉시 마음에 등불이 켜진다. 이를 어려운 말로 명심이라 한다. 마음을 밝힘은 남이 대신 해주지 못한다. 오로지 내가 스스로 밝혀야하므로 자명이라 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자 밝힘이 자명인지라 남이 알아줄 리 없다. 본래부터 자광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제는 너도 나도 자신을 밖으로 빛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꼴인지라 너도나도 서슴없이 자광하는 세태이다. 이러다 보니 살아가자면 자가발전기가 되지 않으면 천덕꾸러기로 밀쳐진다고 다짐하는 자광의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남에게 과시하려니 몸매부터 가꾸는 일인자가 되자고 아우성이다. 이런 탓으로 이제는 사람의 슬기도 비뚤어져 이지러지고 우그러져 가는지라 자지의 명에 관심이 두어질 리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지인이란 바깥 것들을 알고자 함이다. 요즘 세상은 바깥쪽에 촉수를 밝히려다 보니 자기 뽐내는 속셈에만 치우칠 뿐, 지인의 참뜻은 밟히고 빛 좋은 개살구마냥 빤빤해지는 쪽으로 쏠리는 처세술이 출렁인다. 남한테 자기를 광내고자 하면서도 남의 시선 아랑곳 않고 쭉쭉 빵빵 거침없이 살아간다고 떵떵거리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판이니 지인의 슬기도 이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이런 지경의 세상에 자명등을 켜보라고 자식을 채찍질할 애비가 있을 수 있겠는지? 옛날에도 글 읽는 법은 서당에서 배우고 사람 되는 법은 집안에서 배운다고 했다. 그 시절엔 애비가 자식이 자명등을 켜게 하초를 들었다. 허나 ‘꼰대’ 소리 듣게 되면서부터 애비는 자명이라는 낱말을 잊었고 자식은 아버지를 닮지 못해 죄스럽다는 불초라는 낱말을 잊은 지 오래이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된다

(重爲輕根 중위경근이라)

重爲輕根(중위경근)

靜爲躁君(정위조군)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不離靜重(불리정중)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온종일 행사해도 고요함과 무거움을 떠나지 않는다. 노자 26장 참조

가벼운 입은 세 치 혀로 탈을 내고 무서운 입이 낸 한마디 말로는 천 냥 빚을 갚는다 했다. 가벼운 입은 마음이 옅음이고 무거운 입은 마음이 깊음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아무리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도 이와 다를 바 없는지 사람에 따라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한다. 조선시대 윤희라는 선비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묵어가려다가 도둑으로 몰렸다. 마당에서 놀던 거위가 떨어진 구슬 하나를 삼켰는데 사람들은 선비를 의심했다. 도둑으로 몰려 묶이면서 선비는 여관집 거위의 다리를 묶어 자기 옆에 있게 했다는 이야기를 알 것이다. 밤사이 거위는 똥을 누었고, 윤희는 아침에 여관집 주인을 불러내 그 똥 속에서 잃어버린 구슬을 되찾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안절부절못하는 여관집 주인에게 선비는 말했더라면 저 거위의 배를 갈라 확인했을 것이고 구슬이 모이인 줄 알고 삼킨 죄 없는 저 거위가 죽어서야 되겠느냐고 타일러주었다고 한다. 여관집 주인은 윤희 앞에 무릎을 꿇고 절절 빌었다 한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곧 듬직한 무거움이 얕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는 깊은 이치를 터득하게 한다. 그런데 사람의 세상에서 이런 일은 참으로 일어나기 어렵다. 당장 저 거위의 목을 쳐 배를 갈라보라고 으름장을 놓고, 명예훼손이라면 송사부터 펼치는 것이 보통이다.

얕은 물이 요란하지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얕은 물은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깊은 물은 그윽해 그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열 길 물속은 알아봐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속마음일랑 숨겨두고 구렁이 담 넘듯 가벼운 입을 놀려 두루뭉수리로 어물쩍 넘기려는 약삭빠른 사람일수록 도둑놈 제 발소리에 놀라듯이 이러쿵저러쿵 싱겁게 너스레 짓을 편다. 그런지라 얕은 마음은 아무리 감추려 한들 그 속이 얕은 물속처럼 빤히 드러나 들키게 마련이다. 이렇든 가벼운 사람을 두고 “씻나락 속 쭉정이 같은 놈”이라고 옛날에는 손가락질했다. ‘씻나락’이라는 낱말은 볍씨의 사투리이다. 벼이삭에 쭉정이가 많으면 흉년 들었고 그놈이 적으면 풍년 들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쭉정이 같은 인간이 많을수록 그만큼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 어렵다. 그런데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은 자연의 이치이지 사람의 세상에서는 듬직한 무거운 마음이 옅은 가벼운 마음의 뿌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마음이 가벼운 사람일수록 독사 같다는 말이 있듯이 얕은 마음은 조금만 건드려도 바르르 떨며 화를 내고 만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을 가볍다고 했다가는 반드시 변을 당한다. 가벼운 마음을 가볍다고 하면 그 마음속에서 분하다는 불길이 버럭 솟고 만다. 물로도 끌 수 없는 것이 마음이 짓는 성난 불길이다. 그래서 듬직한 마음이 가벼운 마음한테 화상을 입는 경우가 세상에는 허다하다. 마음이 가벼울수록 배려하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지 얕은지 거기서 사람 마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배려하는 마음일수록 속이 깊어 무겁다. 그렇게 깊은 윤희의 마음이 거위의 목숨을 건져주었던 셈이다. 사람의 세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옮기면 언제나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된다. 가을바람에 날리는 깃털이 무겁고 태산이 가볍다는 말이 있다.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무겁다는 것이다. 세상에 씨앗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고 한다. 오동나무의 씨앗은 두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작다. 그것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워 자라서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동나무보다 그 작은 씨앗이 무겁다는 이치를 헤아리게 하는 말씀이 곧 ‘중위경근’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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