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등록 1호 변호사
[노년의 고동소리]등록 1호 변호사
  • 하동뉴스
  • 승인 2019.09.10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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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변호사는 조선 순종 원년(1907) 12월 30일 서울에서 변호사 영업을 시작했던 변호사 등록 1호 홍재기(洪在祺) 변호사였다. 같은 날 차례로 등록했던 2호는 이면우(李冕宇), 3호는 정명섭(丁明燮) 변호사였다. 그 때는 조선이 일본의 힘에 의해 청국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겉으로는 명실상부한 독립국가 고종황제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의 속셈을 알아 챈 고종이 일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자 7월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조금 모자라 보이는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었다.

 같은 달 성난 시민들이 이완용(李完用) 집에 불을 지르고 이지용(李址鎔) · 이근택(李根澤) 별장을 불태웠다. 8월에 순검(巡檢)을 순사(巡査)로 호칭하도록 하였다. 나라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조선의 토지 가운데 2억 3000만평은 벌써 일본 거류민 10만 명 손에 들어갔다. 이 때 전국의 조선인 인구는 모두 988만 8090명으로 1천만 명에서 조금 모자랐다. 역사상 첫 변호사 홍재기는 고종 10년(1873)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동관찰부 주사로 관계에 들어갔다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1902년 일본 도쿄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 했다.

 1904년 귀국한 이듬해 조선의 한성 법학원, 보성 법학원에서 법학교사로 일했다. 이어 법관양성소장, 변호사시험위원, 한성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홍재기 변호사가 한성 재판소에서 판사로 일하던 어느 날 애국 계몽 운동을 활발히 하던 이준(李儁) 열사가 구속당해 법정에 섰다. 이 때 홍재기 판사는 ‘민불지법(民不知法)의 폐해’ 즉 ‘백성이 미쳐 모르는 법의 폐해’라는 판결문을 열변을 토해 설파했다. 결국 이준 열사가 무죄 석방되도록 판결하였다. 검찰권을 장악했던 일본의 조선통감부는 예상 밖의 판결에 놀랐다. 이 일로 홍 판사는 진실로 한국인 백성을 돌보는 한국인 판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뒤에 이준 열사는 1907년 3월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매국 행위를 꼬집어 탄핵하였다가 곤장 100대를 맞기도 한 애국자였다. 그는 같은 해 6월 네덜란드 헤에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위종(李瑋鍾),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파견됐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하였다. 변호사를 시작한 홍재기는 항상 가난한 서민들과 어울려 애환을 함께 하려 마음을 썼다. 어려운 동포들을 살펴 무료 변론을 일삼았다. 언제나 열차 3등 칸을 타고 다니며 서민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거마비를 아꼈다. 살인죄로 몰린 한 농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농부의 무죄 입증을 위해 광복 직후 산골에 잠복한 좌익 빨찌 산들의 총격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 들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물론 누명을 썼던 농부는 무죄로 풀려났다.
 1950년 전주지방법원 정읍 지원장으로 발탁돼 일했던 홍재기 변호사는 6·25 전란을 맞아 미쳐 몸을 피하지 못했다. 끝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힌 홍 변호사는 패주하는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가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당시 나이 77세였다. 한국인 변호사 등록 1호 홍재기 변호사는 이렇게 험한 세상을 살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 홍재기 변호사의 일생이 한 특정인의 흔적으로만 묻혀 버리기에는 아쉽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나라는 언젠가는 패망한다. ㈔대한노인회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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