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면의 전설(유래)
화개면의 전설(유래)
  • 하동뉴스
  • 승인 2020.06.0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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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의 유래

변한(弁韓)의 낙노국(樂奴國)에 속하였다가 신라 성덕왕 "화개(花開)-꽃피는 곳" 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순조 25년(1825)-화개상.하면을 합하여 화개면으로 정하였다. 화개, 말 그대로 꽃이 만발한 고장이다. 쌍계사 창건 설화를 볼 때 화개라는 지명은 불교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와 관련된 마을 이름이 많을 뿐 아니라 김수로 왕과 관련된 지 역시 불교와 관련이 깊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이라 했는데 세조 때 이륙 선생은 영신사 작은 샘으로부터 발원하여 신흥사 앞에 이르러 큰 내가되어 섬진강에 흘러들어 가는데 이를 화개동천 이라 한다고 했다. 화개면은 육조 삼법 두 스님이 육조 혜능대사의 (頂相 - 머리 )을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모셨다 하여 화개(花開)로 불리게 되었다. 이전 지명은 좁은 나루란 의미로 협포라고 했으나 경덕왕 때 화개라는 지명이 정해졌으며 진감선사 대공탑비에도 화개로 적혀있다.

부춘리

마을의 이름은 원래 부처가 나는 동네 또는 부처가 난 동네란 뜻의 불출동에서 부춘이란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하동 화개의 특산품인 녹차 농가가 주를 이루며, 깊은 계곡과 야생 녹차 밭이 조성되어 있어 테마관광 및 녹색농촌체험을 할 수 있다. 형제봉 산허리에 매달리듯 붙어 있다 해서 부치동, 고려시대 원강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부처골이라 했는데 부처골이 변해 부춘이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이 들어서 최충헌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고 장차 난리가 날 것을 예감한 한유한 선생이 골짜기에 숨어 산 곳이 부춘동이며 손수 불출동이라 쓰고 평생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북쪽에는 평평하고 가끔 산삼을 캐기도 한다는 삼밭평전이 있다.

검두

1820년대 이후 조성되어 화개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다. 검두의 옛 지명은 용두이다. 검두마을 앞들과 섬진강 건너 북섬과 옥녀봉등 부근 넓은 지형이 선녀가 배틀에 앉아 비단을 짜는 형상이라 하여 옥녀 직금형이라 불린다. 옥녀봉아래 마을은 비단을 짠다는 직금마을 (광양시 다압면)이고 검두 앞들은 바디들로 불리고 있으니 옥녀의 맞은 편, 높은 곳이 베틀의 용두가 되니 원지명은 용두였으나 신선봉(장군봉으로 불리기도 함)의 장군이 북을 치니 옥녀가 칼춤을 추는 형상으로 칼머리에 해당한다하여 검두가 되었다고 한다.

덕은리

마을의 이름은 일두 정여창 선생이 거처하여 그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라 하여 "덕이 숨어있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 되었으며, 주로 녹차, 고사리, 매실 등 무공해 농산물 재배에 경쟁력이 있음. 섬진강이 마을 앞을 가로지르고 있다

상덕

일두 정여창 선생이 1490년 전후에 두 동생과 처자를 데리고 이 곳에 와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3년을 살았다. 선생이 학문을 가르치던 정자가 악양정이다. 이는 선조 31년에 화개현을 악양리에 합하여 104년간 악양현에 속했다. 선생은 오경과 성리학에 통달하여 성종으로부터 연산군의 스승을 제수 받았다. 고향은 함양이고 하동 정씨였던 선생은 성종이 불러 술을 내리자 어머님 생전에 음주를 탓하여 그 뒤로 음주를 하지 않기로 맹세 하여 임금의 명을 거역한다고 정중히 사양하여 임금이 찬탄하며 참다운 儒者의 모습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영당

옛 이름은 가은동 이었으나 순조 24년 ( 1824년 )금천사를 세워 쌍계사에 있던 고운 선생 영정을 이곳으로 모셨다 하여 영당으로 불렀다. 금천사는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고운선생 영정은 양보 고운영당에 모셔져 있다. 남명 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 보면 도탄에서 한마장 가면 정여창 선생이 살던 곳이다 라고 하였으며, 하동군지에는 남명. 이구암. 이황강 세 선생이 배를 메고 시를 읊은 곳이라고 하였다. 악양면 외둔에 한유한의 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서 쉬어 간 것으로 보인다.

중기

덕은동 아래 있어 중덕은으로 불리다 중기로 부르게 되었다. 상덕 동남쪽 들을 대금이들 이라고 하는데 젓대라고도 부르는 대금은 황죽을 쌍골죽으로 만들어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대금이 들에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금을 부는 총각과 노래하는 처녀의 전설 따라 다금을 불던 총각이 살던 곳은 대금이들이 되었고 노래하던 처녀가 살던 곳은 연창이라 불렀으나 소금배가 드나들면서 염창(다압면)이라 불리고 있다.

신기

일두 정여창 선생의 덕이 숨어 있다는 덕은동 남쪽 마을이 중기(중덕은동)이고 남쪽 새터에 마을이 생기니 새터(신기)로 불리게 되었다. 남쪽에 소나무가 많은 산에는 절이 있었다하며 그 앞에 연못이 있던 들은 방죽깨미라고 불렀다. 들머리에 있는 바위는 장수의 발자국 같다하여 장수바위라 불렀으며 가마바위. 갓바위. 토끼바위. 호랑이바위. 망바위. 선바위. 온천바위 등 재미있는 이름의 바위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탑리

마을이름은 지금까지 3층 석탑이 남아있어 탑몰, 탑촌, 탑동으로 불리어 왔다. 탑리는 화개장터와 남도대교가 있고,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신협, 보건소 등이 있어 경제, 행정 등에서 화개의 중심마을로 화개장터 및 남도대교 등 지역 특성과 연계하여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주요볼거리는 화개장터, 남도대교,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 길이 있으며, 도 지정 문화재 제130호 탑리 3층 석탑이 우체국 내에 있고, 기타 학도병전적비가 있다.

원탑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봉상사가 있던 곳으로 구 우체국 자리에 3층 석탑이 남아 있어 탑몰, 탑촌,탑동으로 불렸으며 화개천을 두고 장터와 구분하기 위해 원탑으로 부른다. 화개장터는 언제부터 장이 섰는지 알 수 없으나 군지에 의하면 1726년부터 있었다고 하며 1913년 5일장이 섰고 연간 거래액은 5600원이었다고 한다. 화개의 옛 지명이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협포라 불렸던 것을 보면 장이 있던 곳이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조선말까지 섬진강을 통해 내륙으로 통하는 화개관이 있었으며, 6·25와 여순 반란사건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학살당한 시체를 임시로 매장 했던 가장골이 화개 파출소 남쪽 계곡에 있으며 고지위에는 학도병과 국군의 넋을 기리는 표지석이 있다.

 

가탄

선경과 같이 아름다운 여울이란 뜻의 가여울로 신선이 가여울에서 낚시를 하여 가탄이 되었다고 한다. 1931년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신작로가 2년여 동안 삽과 곡괭이와 등지게를 한 주민들의 부역으로 완성되었다. 신작로 완성 후 군내 유지들이 자금을 각출하여 홍도화 200그루와 벚나무 1200주를 가로수로 심었다. 이 때 벚나무는 일본에서 주당 10전에 사 왔다고 하며 당시 한정식 1상 가격과 맞먹었다고 한다. 당시 이소영 군수는 세상에 명물이라 칭하리로다 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화개 명물이 되어 있다.

법하

1632년 발간한 진양지에 기록된 화개의 10개 마을 중 하나인 법가촌이다. 진양지에는 법하 남쪽에는 마을이 없었고 법하부터 섬진강 수해로부터 안전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 같다. 화개골 전체가 수많은 사찰이 있던 불국토로 부처님 법아래 있는 마을 寺下村 이란 뜻의 법하촌이 되었다. 마을 앞 화개천에는 용왕소 옆 시내 가운데 바위틈에 약수천이 있었다. 1927년 약수가 솟았다고 하며 유황과 철분이 섞인 유황약수로 짙은 유황 냄새가 나고 피부병, 위장병, 머리비듬에 유효하다고 소문이 나서 찾는 이가 많던 곳이었다. 아쉽게도 큰 홍수가 나서 현재는 큰 돌에 덮여 없어졌다.

삼신리

예부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을 시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삼신산이라 불렀다. 마을 북쪽에 방장산이 있고 서쪽에는 봉래봉이 있어 삼신마을이라 불렀다. 화개의 현청은 임진란으로 불타기 전에는 용강리에 있었고 임란 후 신촌으로 옮겼다가 현이 면으로 바뀌면서 1902년 김진호 초대면장 당시 삼신마을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수로 왕이 7왕자를 만나기 위해 행차 도중 옷고름이 떨어져 경치가 좋은 곳에서 쉬면서 바느질을 시킨 곳이라는 침점이란 지명이 있다. 삼신마을은 전형적인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며, 특히, 삼신녹차정보화시범마을로 지정이 되어 자체 생산되는 농산물, 녹차, 밤 등 생산물을 인터넷을 통하여 판매 하고 있다.

운수리

이 마을은 하동을 대표하는 쌍계사가 속해 있는 마을로, 마을 이름은 쌍계사의 남쪽에 석문동이 있고, 쌍계사의 동쪽에는 운수동이 있었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어 새로운 법정 리동을 만들면서 운수리가 되었다. 농촌관광마을을 조성하여 쌍계사, 불일폭포를 찾는 기존 관광인력을 흡수하여 무공해 농산물을 판매하여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으며, 주요 볼거리로는 쌍계사, 차 문화센터, 차시배지, 불일폭포, 국사암 등이 있으며, 각종 보물과 문화재가 많이 있다. 운수리는 화개 부곡지역이었는데 경덕왕 대 화개현으로 하동에 속했고 고려 때는 진주에 귀속되었으나 1702년 하동군 화개면에 다시 편입되었다.

신촌

석문 남쪽 마을로 임진란 때 용강에 있던 현청이 불타자 새로운 현청을 지어 신현촌이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오래전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노루목 부근 노거목에 큰 지네가 살아 마을에 괴질이 많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정금리

마을의 옛 이름은 가야금을 탄다는 탄금이다. 마을 앞 들판 드문드문 큰 바위는 거문고 위의 기러기 발이고 화개천과 수평으로 나 있는 논두렁이 12현으로 앞들 전체가 가야금으로 옥녀 탄금형 이라고 한다. 정금으로 불린 것은 고운 선생이 달밤에 화개천 경치에 취해 가야금을 즐기며 머물렀다하여 머무를 停을 써서 정금이라 불리다가 옥보고가 옥보대에서 거문고를 타면 마을 우물인 통세미에서 연주소리가 울려와 井琴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용강리

마을의 이름은 옛날 쌍계사의 연못에 불기운이 비치면 건너 산에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서곤 하였는데, 쌍계사 스님들은 건너편 구름이 항상 서리어 있는 곳에 용이 산다고 하였다. 구름일고 무지개가 서는 곳을 무지개 골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산등성이에 용이 산다고 하여 용강이라 하였다.

석문

쌍계사 입구에 쌍계 석문이라 쓰인 두 개의 큰 바위가 문처럼 서있어 석문이라 한다. 6조 혜능대사가 禪知識인임을 알아 본 삼법스님은 육조단경에 내가 입적한 후 5 –6년이 지나면 한 사람이 와서 내 머리뼈를 가져가리니…라고 예언한 글귀를 보고 내가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을 지으리라 하고 결심하였다. 대비스님과 함께 중국 소주의 보림사에서 6조 혜능대사의 머리뼈를 가져와 봉안하고 조그만 암자를 지었다. 후에 혜소 진감선사가 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넘쳐나 남쪽에 옥천사를 짓고 정강왕 때 쌍계사로 개칭하였다

쌍계사

신라성덕여왕 21년에 삼법스님이 당나라로부터 선종의 육조이신 혜는 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오는 도중 꿈에 지리산의 눈 속에 칙 꽂이 활짝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현몽을 받고 호랑이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봉안하고 세운 절이며 봉안 후 8년을 수행하고 6조 영당을 지었다. 처음에 절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가 정강 왕이 쌍계사라는 절 이름을 하사 하였는데 보는 이 마다 병속에 담긴 별천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폐허가 된 것을 벽암 각성대사가 창건의 마음으로 다시 세웠다. 쌍계사는 선종의 역사와 함께 출발한다. 서부 경남 일원의 사찰을 총탑 하는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로써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문성왕 2년(840년) 진감선서 혜소가 옥천사라 하였다가 정강왕 2년 쌍계사로 바뀌었다.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와 보물 9점 등 문화재 29점을 보유하고 있다. 쌍계사 가을은 하동 8경중 하나이다.

불교음악(염불)범패(하늘의소리)의발상지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범패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친 팔영루에서 섬진강에서 노는 물고기를 보며 칠음율로 범패를 만들었다. 쌍계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이다.

-쌍계사문화제현항-

국보 1점: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제47호)

보물 6점 :1 대웅전: 500호, 2. 진감선사 부도: 380호,

3.대웅전삼세불탱화:136호 4.대웅전삼세불사보살상:1378호

5.팔상전영산회상도:925호 6. 팔상전 팔상탱화: 1365호

유형문화재 9점 : 1.석등 2.일주문 3.팔상전 4.명부전 5.나한전

6.육조정상탑 7.천왕문 8.금강문 9 .불경책판,

문화재자료5점 :청학루 적묵당 마애불 팔영루 설선당,

부속암자로는 국사암 불임암이 있고. 65개의 말사가 있다

국보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진감선사가 열반하신 후 왕이 하사한 비 고운 최치원선생께서 12살에 당나라에 가서 유학을 하여 18세때 과거에 급제하신후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고 비문을 짓고 썻다. 약간 남쪽으로 향해 금당을 마주보고 있으며 대웅전 하고는 약간 틀어져 있다.

운각: 용의머리(생각을 높이본다는뜻) 밑판: 거북이문양(물속의왕:장수를뜻) 높이:2.2M 본문: 해서체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다.

글자: 2423자

뜻:(만법개공)

진감선사가 제자들에게 설법하기를 모든게 다 공이니 잘 생각고 근본을 앞세우고 모든 사리사욕을 다 버리고 사람의 도리를 다 하라는 뜻

녹차에 관한 글귀가있어 우리나리 녹차 시배지가 확인되었다,

벽면에 총탄자국이 많이나있눈것은. 빨치산의 싸움 때문이다.

불경책판

조상들의 가르침을 혜능대사의 제자들이 기록하여 만든 국내 유일본이며 우리나라에서 해인사 다음가는 책판 보유사찰로서 현재 1743매가 잘 보관되어있다.

불일폭포.

쌍계사에서 10분정도 올라가면 불일 암이 있고 약 1시간을 오르면 불일폭포가 있다. 폭포의 높이는 60m 폭3m의 상·하 2단식 폭포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정말 아름답다. 지리산 10경중 하나이며 쌍계에서 3㎞왕복 2시간 정도 되는 간단한 등산코스로 너무나 아름다운 폭포다. 폭포아래에는 학연과 용추라는 못이 있고 이 연못에 비친 산봉우리가 학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청학, 백학봉이라 이름 지었으며 남명조식, 서산대시의 시가 쓰여 있다. 꼭 한번 등산 해 보면 아름다운 지리산의 절경을 맛볼 수 있다.

 

목압

진감선사가 절터를 잡기 위해 나무오리를 날렸다. 주민들은 나무오리를 목오리, 목거리라 불렀으며 마을에는 쌍게사 국사암 보다 오래 된 절이 있었다고 한다. 용담스님 비문에 의하면 1864년 옛 목압사 뜰에서 탑을 옮겨와 6조정상탑을 굳게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넓은 터에 노송 한그루와 석재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화개면 향토사학자 김동곤 선생은 삼법스님이 설리갈화처가 여기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용강

산촌인 화개에서 평평한 전답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하여 평뱀이, 평야촌으로 불렸다. 옛날 쌍계사 진감선사 비석 앞에 있던 연못에 불기운이 비치면 건너 산에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서 무지개 골로 불렸다고 한다. 쌍계사 스님들은 건너편 구름이 서려있는 곳에 용이 산다고 하여 용강이라 하고 마을 남쪽은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룡동이라 부른다.

모암

지네산 아래 화개천을 사이에 鷄原, 모암마을이 마주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는 보리암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마을이다. 모암 마을 건너편에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지네가 기어가다 고개를 들고 닭의 형상인 모암 마을을 건너다보는 형상이라 한다. 마을 동쪽 개울 건너편에는 연꽃들이 피기도 전에 장마가 오면 연꽃잎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화랑수라 했다고 한다.

범왕리

마을의 이름은 범왕마을에 있는 칠불사의 전설에 의하면, 벌써 1세기 경에 이미 사람이 살았고, 화개 쪽 지리산의 개산조는 이들 칠왕자들이었다. 거의 대부분 가구가 임산물 및 농산물 생산에 매달리는 전형적인 농가다. 인근 쌍계사 및 불일폭포 등을 찾는 관광객을 유치하여 민박 및 자체 생산 무공해 농산물 판로를 찾았다. 주요 볼거리로는 칠불사, 아자방, 칠불사 세이암이 있고, 문화자원으로는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44호 칠불사 아자방지, 도지정 기념물 제123호 범왕리 푸조나무(왕성초등분교 교문앞)가 있다.

푸조나무

고운 선생이 세속의 더러움과 인연을 담은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 건너편에는 수령1200년, 높이22m, 둘레5.7m의 거목(巨木)이 있는데 고운 선생이 입산하면서 그 동안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산을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이 정자나무는 깊은 연유를 간직한 채 오랜 풍우와 거친 세월을 지나오면서 아직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무성히 자라고 있다.

세이암

칠불사 계곡 물과 의신 쪽 계곡 물이 합류하는 신흥마을 앞에는 그 중에서도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계곡바닥에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고, 기암절벽 깊은 소(沼)가 있는데 그 절벽 중턱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여기에 고운 최치원 선생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 멀리 당나라에까지 가서 천하에 문장을 떨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나라의 운세가 다하자 세속에 뜻을 잃고 심산계곡을 찾아 천하를 주유하다 이곳 화개동의 절경에 넋을 잃었다고 합니다. 구름은 산허리를 감돌아 운해(雲海)를 이루고, 옥류는 보석 같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데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져 가히 선계에 든 것 같았고, 천하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유유자적하였지만 이곳 절경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진세의 비속(卑俗)한 말을 들은 귀를 씻으리라. 그리고 다시는 세상의 속됨에 몸을 담지 않으리라 하며 고운 최치원 선생이 귀를 씻고 풍진에 더러워진 몸을 씻고 있을 때 커다란 게가 바위틈에서 나와 선생의 발을 물었습니다.허허 고약한 지고 다시는 이곳에 와서 사람을 물지 말라! 하며 게를 멀리 던져 버렸는데, 그 게는 모암리 계원 냇가에 떨어졌는데, 그때는 이 계곡에 유난히 커다란 참게가 많았으나 그 이후로 계원 부락 상류에는 게가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몸을 청결히 씻은 고운 선생은 지리산 속을 두루 돌아다니며 다시는 인간 세상에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신흥마을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속세를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속세에 더럽혀진 귀를 씻었다고 전해지는 세이암이 있는 곳이며 또 선생께서 목욕을 하는데 참게가 발가락을 물어 이를 고약히 여긴 선생께서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 했는데 그 이후 이 근처에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하기에 적지인데도 한 마리의 게가 없으며 섬진강에서만 게가 잡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칠불사

지리산 반야봉 남쪽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소재)는 삼국 시대 초기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 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리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동국여지승람 하동지』등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태어났으며 인도 갠지스 강 상류지방에 5세기부터 있었던 태양왕조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왕자와 삼남 명(明)왕자는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하여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 스님 장유보옥(長遊寶玉)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62년(서기103년) 음력 8월 15일 모두 성불이 되었다 합니다. 이들 일곱 왕자들인 혜진(慧眞), 각초(覺初), 지감(知鑑), 등연(等演), 주순(柱淳), 정영(淨英), 계영(戒英)은 성불한 후 각각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공불(金王空佛)로 불리었다.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 그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해서 칠불사(七佛寺)라 불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고 하는 고구려 소수림 왕 2년(서기372년) 보다 약 270여년 앞선 기록입니다. 『372년 북방전래설』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임에 반해 이곳은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 이와 같은 창건 설화를 지닌 칠불사는 종래의 북방 불교 전래설과는 또 다른 남방 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토끼봉 아래해발 800고지에 위치해 있으며 동국 제일 선원이라 불리는 명당 이라고 한다. 묘 자리는 오대산이 좋고 집터로는 칠불사가 좋다r 전해지고 있다. 칠불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칠불사는 통일신라이후부터 동국제일선원이라 하여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더불어 남북으로 쌍벽을 이룬 우리나라의 대표적 참선도량으로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조의 정명, 조선조의 벽송, 조능, 서산, 부휴, 백암, 선사 등이 대표적이며, 또한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 초의 선사가 1828년 이곳 아자방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퇴락한 가람을 서산부휴선사가 중수(重修)하였으며, 서기 1800년에 보광전 약사전등 십여 동의 건물이 실화(失火)로 전소되었으나 금담, 대은 두 율사에 의해 복구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1월 지리산 공비토벌 때 국군의 방화로 아자방을 비롯한 대가람이 모두 불타버렸다.

▲영지

수로왕은 7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으로 가니 7왕자들의 그림자가 연못 가운데서 침금신(일곱 부처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신기하게 전해지는 영지가 있어 가락국의 신비와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의 전래과정을 느끼게도 해주는 곳입니다 주위에 절을 세워 부왕이 있었던 절을 “범왕사” 대비가 머문 절을 “대비사” 라 하였으나 현재 절은 모두 없어지고 지명으로 바뀌었고 칠 왕자가 부처님 모습으로 나타난 연못을 “영지”(성스러운 연못)라 부르고 있다.

칠불사는 문수보살 도량이며 지혜를 상징한다. 뒷산 반야봉(인도말)지혜를 상징한다.

▲아자방(벽안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신라 효공 왕 때 담공 선사가 벽안당에 온돌방을 축조하였는데 그 방모양이 아자와 같아 “아자방”이라고 한다

온돌방의 내부는 바닥이 높이가 다른 2단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보다 45cm가량 높고 경계면이 ㄷ자형으로 가운데가 파여진 모양을 하고 있어서 온돌방 바닥의 전체모양이 아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자방은 길이가 약8m 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곳으로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온돌은 불만 넣으면 상하 벽면까지 한 달 동안이나 따뜻하다고한다. 현재는 평범한 크기의 아궁이로 되어있고 아궁이 깊이는 대략 2m 가량으로 다소 깊은 정도이며 아자의 곳곳마다 놋쇠 판을 대고 건물 좌측에 따로 떨어져 있는 굴뚝에는 열을 조절하는 놋쇠판을 두어 온돌의 열효율을 높이고 있으며 한번에 7짐의 장작을 넣고 불을 땐다고 한다. 참선, 수도, 섬방으로 쓴다. 1828년 초의스님이 중국의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련 된 것만 뽑아서 “다신전”이라는 책을 쓴 곳 이기도하다.

-아자방 3가지 규칙

1. 늘 앉아있고 눕지 않는다.

2. 점심식사 1끼만 먹는다.

3. 묵언(말을하지 않는다)

칠불사는 하늘에서 보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 소의 젓꼭지 위치에 약수 샘이 있다. 꼭 한잔씩 드시게 함. 그 후 30년 가까이 잡초만 무성한 폐허로 버려져 있던 사찰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선사가 1978년부터 20여년에 걸쳐 대작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상원: 옥보고가 거문고 35편을 지음 (영산 해상곡) 사찰. 뒤편에 옥보대가 있다

옥보대: 우륵이 거문고를 타며 가야금곡 35곡을 지었던 곳. 운상원과 아자방에는 20여명의 눈 푸른 선객(禪客)들이 불철주야 반야의 보검을 갈고 있다.

대성리

마을의 이름은 1914년에 지금의 대성동에 덕평동,기수곡, 평지촌,빗점, 삼점, 사리암, 고사암, 송대, 의신, 단천을 합하여 대성리라 하였다. 화전민의 후예로 비농가 비율이 높으나 실질적으로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ㅎ했다. 산골짝을 끼고 있어 경작에 어려움이 있으나 고랭지 채소나 무공해 농산물 생산에 유리한 이점이 있어, 타 지역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

소년부도 이야기

지리산 계곡, 쌍계사에서 화개천을 따라 20여 리를 오르면 칠불사(七佛寺)가 나타나고 그 500m 아래엔 푸른 이끼가 돋아난 탑이 있다. 이 탑은 흔히 소년 부도라고 불려지고 있으면 애틋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옛 가야의 일곱 왕자가 성불을 했고 옥보고가 각고면려하여 노래를 짓던 신비와 낭만의 계곡인 칠불계곡은 잔잔한 고요와 산새와 물소리, 그리고 하늘이 낮게 흐르는 곳이다. 봄이면 이름 모를 꽃들이 산곡을 따라 피어나고 여름이면 울창한 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간다. 가을엔 단풍이 많아 형형색색의 모양과 색소로 새로운 자연을 만든다. 겨울엔 하얀 눈 속에서 칡꽃이 핀다. 사계절이 돌 때마다 신비와 원시의 가슴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칠불사를 중건하는 공사가 벌어져 마을의 머슴꾼과 승노(僧奴)들이 동원되었다. 중건공사에 일하는 일꾼들은 30리 아래의 사하촌에서 기와를 지고 험한 산길을 왕복해야 했다.

그 때 칠불사 상좌(上位)중에 여자처럼 예쁘고 마음씨가 고운 소년이 있었다. 이따금 냇가에 앉아 떠가는 구름을 보기도 하고 만나는 일꾼을 보면 싱긋 웃기도 하여 모두가 그를 좋아했으며 더구나 일꾼들은 이 소년 중을 바라보며 일선을 멈추기도 하고 얼굴이라도 쳐다보려고 꾀를 부려 소년 중을 바라보고 서서 입을 벌린 채 멍청해지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상좌가 여자라고 생각을 굳혔으며 서로가 모여 여자라고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년은 그대로 남자였고 평소와 다름없이 일꾼들을 보면 웃어 보이면서 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절의 중건이 예정기일보다 늦어졌으며 농사철이 되자 일꾼들은 줄어만 갔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절에서는 스님들까지 중건공사에 나섰고 이 소년중도 마침내 그의 육체를 내맡겨 기왓장을 나르는 일꾼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시중을 들어 주었다. “스님, 참 손이 예쁩니다.” 하고는 일꾼들은 그의 손을 만지기도 했고, “입술이 앵두 같구먼.”하고는 그윽이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씩 웃기도 하며 그의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상좌가 같이 일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꾼들은 다시 모여 들었고 모두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이다. 요즈음 생각하면 일종의 동성연애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꾼들과 어울려 30리 길을 왕복하며 기왓장과 재료를 나르던 소년중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고 눈이 쑥 들어갔는데도 그는 아침 일찍 이러나 그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세월은 흘러 절은 중건이 되었지만 소년 중은 그만 지쳐 쓰러졌다. 헛소리를 하고 열이 올라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고 이 소식이 사하촌에 전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줄을 이어 문병을 왔으며 그의 쾌차를 빌었다. 하지만, 다시 회복될 기미는 없었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그는 죽었으며 모두가 슬프게 울었다. 절의 주지와 신도들은 절을 세우면서 희생된 소년 중을 위해 명복을 비는 뜻에서 그들의 정성을 쏟아 탑을 세웠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우뚝, 풍우를 맞으며 말없이 서있다.

性器(성기) 바위

하동군 화개면 칠불사에 어질고 아름다운 스님이 있었다. 皎皎(교교)한 달밤에도 그는 열심히 염불을 했고 더운 여름철엔 좌선(坐禪)과 보시(布施)도 잊지 않았다. 절을 찾는 신도들도 그의 어짐과 깊은 신앙심에 존경을 표했고 아름다운 모습을 찬양하기도 했다. 어질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스님의 이야기는 사하촌에 펴져 사하촌의 처녀들은 마음을 설레며 그 스님을 한번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처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칠불계곡을 따라 30리 산길을 오르기도 했다. 깊은 계곡에 울려 퍼지는 처녀들의 웃음소리는 화사한 봄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많은 처녀 중에서 세 처녀가 깊은 연모의 정을 품고 있었다. 순이라는 처녀는 해가 지자 홀로 산길을 따라 칠불사로 갔다. 그의 마음은 오직 스님의 영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무서운 밤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땀에 젖은 얼굴이 붉게 타오르며 그는 절 앞에 섰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녀는 법당으로 갔다. 스님은 염불을 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스님 옆에 앉아 합장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엔 부처의 자비로운 얼굴보다 옆에 있는 스님의 얼굴뿐이었고 가슴의 고동소리가 목탁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이윽고, 스님의 염불이 끝났다. 그녀는 스님을 보았다. “밤길을 오셨구먼요, 불심이 대단하십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녀도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스님을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님은 그녀를 보며, “무슨 일입니까? 밤이 아주 늦었는데 돌아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스님은 순이를 안다. 그녀가 몇 번이나 보시 때 보여준 그 사랑의 신호를 모를 바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수도(修道)하는 자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모른 척 했고 또 그것이 자신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순이 옆집의 옥이도 그 윗집의 복실이도 안다. 이들 세 처녀가 자기에게 깊은 연모와 짙은 사랑을 나타냈기에 더욱 싸늘했고 언젠가는 이 허황된 꿈에서 처녀들이 깨어날 것이라고 믿었으며 부처님을 향한 자신에겐 큰 시련이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성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주지스님이 계신 곳으로 가시지오. 거기서 유하셨다가가 날이 밝으면 집으로 가십시오.”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총총히 법당을 떠났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스님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이는 힘없이 돌아섰다.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크게 산을 타고 들렸지만 그녀는 무섭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30리의 밤길을 길고도 멀었지만 순이에겐 그저 슬픔의 길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뿐이었다. 순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녀는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옆집 옥이는 절로 뛰어갔다. “스님, 순이가 위독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님은 빙긋이 웃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옥이도 그의 가슴에 타는 연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스님은 그뿐, 옥이도 깊은 슬픔을 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복실이도 집에 갔다가 깊고 깊은 비련의 정을 안고 돌아왔다. 세월은 자꾸 흘렀고 처녀의 가슴은 깊은 상사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동네 처녀들도 그 스님을 사모하게 되었고 청년 스님을 짝사랑하는 처녀들은 늘기만 했던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 갈 무렵에 순이는 냇가에 나와 청년 스님을 생각하면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소식이 절에 전해졌고 스님은 법당에 앉아 그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두 눈에선 연민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나 스님은 이런 일에도 구애됨이 없이 수도에 정진했고 목탁소리를 더 높이기만 했다. 그 해 겨울, 옥이도 스님에게 깊은 연민의 상처를 남기고 순이가 죽은 그 물에 빠져 죽었다. 스님은 두 처녀가 극락왕생하도록 부처님께 ‘나무아비타불’을 외치며 몇 날 밤을 빌면서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전생의 업보이며 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욕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은 어김이 없었다. 그 유난히 긴 겨울은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눈바람이 지고 개울은 새로운 생명력으로 조잘거리며 흘렀다. 잿빛산은 푸른빛으로 변해 갔으며 물 머금은 버들잎이 새로 우거졌다. 스님은 보시를 떠났다. 보시를 하며 수도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동네 어귀를 지날 때 그는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복실이도 순이가 죽은 그 곳에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것아 모두 저 스님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보시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녀들이 죽은 냇가를 보니 굽이치는 물결이 바위틈으로 휘돌아 가는 힘찬 물굽이가 보였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절로 달려갔다. 이것은 모두 삼악도(三惡道)의 시련이며 어서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몇 번이나 목탁과 염불을 외쳤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편안하지 못했다. 괴롭기만 했고 순이과 옥이, 그리고 복실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소리를 높여 외쳤다. 목탁도 더욱 힘차게 쳤다. 그날 밤에 또 사하촌의 처녀가 왔다. 연모의 말을 남기고 갔고 또 다른 처녀가 오기도 했다. 스님은 점점 괴로웠다. 자신은 수도하는 몸,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 후 스님은 괴로움에 못 이겨 절문을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별빛이 유난히 새로웠고 산새의 울음이 슬프게 들려왔다. 발부리에 부딪히는 돌이 아프게 가슴을 찔러왔다. 그래도 그는 걸었다. 십리 가까이, 그러니까 자기를 짝사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여인들이 빠져 죽은 그 냇가에 그는 이르렀다. 심호흡을 했다. 굽이치는 냇물소리가 유난히 똑똑했다. 스님은 두 손을 깍지 끼고 바위에 누웠다. 먼 하늘의 별빛에 눈을 두고 ‘나는 내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인간인가? 아니면 중생을 위해 살아 갈 인간인가? 이 죄 없는 생명을 끊은 것은 모두가 나로 인해 생겼다면 나는 진정 무슨 수도를 했으며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별빛은 모두가 영혼이라고 하는데 진정 그렇다면 저 별빛 속엔 순이의 영혼과 옥이, 복실 이의 영혼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도 주지 못하고 싸늘한 절망의 가슴을 준 것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수도는 무엇을 한 것일까?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울져 흐르는 냇물을 보았다. 그 여울지는 물살에 순이의 얼굴이, 그리고 옥이와 복실이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는 몸을 던졌다. 죽는 것이 남을 구하는 길이요, 내 하나가 없다면 앞으로는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이들이 죽은 냇가엔 이 이후 바위가 새로 생겼다. 그 바위가 꼭 여자의 성기 같다고 하여 성기바위라고 불리어 오고 있으며, 그로부터 많은 스님들이 破戒(파계)를 했다고 한다.

노루목 이야기

화개 골에 봄이 왔다. 화개천의 맑은 물은 소리가 한층 높았고 잿빛으로 변했던 산들은 파랗게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꿩이 구성진 산새 소리에 어울려 이따금 저 멀리 산 쪽으로 날고 있었다. 철쭉은 골마다 붉디붉은 색깔을 피우고 밤이면 두견새가 구슬피 운다. 아직은 지리산의 눈바람이 차갑게 불어오지만 그래도 봄기운은 뚜렷했고 망울지는 꽃나무는 촉촉이 생동감을 피우고 있었다. 화개면 운수리 신촌과 정금의 두 동네 사이에 크게 튀어 나온 산을 노루목이라 한다. 이 노루목엔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리산록의 이곳은 준엄하게 깎아지를 악산이었고 깊은 골엔 항시 무서운 짐승과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 고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젠가는 산이 걸어 나와 이곳이 도읍지가 될 것이고 수많은 나라가 조공을 바치며 나라가 크게 영화를 누린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은 침침한 숲 사이로 그 준험한 산은 걸어 나올 줄 몰랐고 영험스러운 기운만 항시 드리우고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진 절은 1만 8000개가 넘었고 저녁이면 그 종소리에 아늑하리 만큼 고요는 찾아왔다. 스님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위해 항시 법문을 외웠고 모든 사람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정성과 기대로 가슴은 뛰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풍요로운 날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신의 뜻이 언젠가는 이루어져 이 좁은 고을이 넓게 터져 만경벌판이 될 것이며 축복이 내려 행복하게 살날을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징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흔들릴 줄 모르는 산은 침묵만을 보여주었다. 천둥이 울면 이들은 산을 보았고 조금이나 이상한 일기의 변화에도 그들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다림으로 가슴을 설레며 종일을 서성대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또 이런 이야기 때문에 객지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사람이 많았으나 항시 조그마한 변화에도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자연 여기에 대한 관심도 점점 엷게 되었고 초조와 기대감으로 이곳에 정착한 분들만이 기다리며 이야기를 되씹곤 했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화개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흐르는 물에 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빨래를 했다. 한데, 지금까지 빨래를 하는 물밑에는 파란 하늘과 산봉우리뿐이었는데 그 산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물결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또 빨래를 했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빨래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또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들어봤다. 그 때, 정금부락에서 산이 뚜벅뚜벅 걸어 신촌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그녀는 그만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계속해서 산은 신촌 마을로 걸어오지 않는가, 그녀는 소리쳤다. “어마, 산이 걸어온다.” 그 소리를 산이 듣고 금방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그녀의 고함소리를 듣고 놀란 동네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 나와 산이 서는 것을 보았다. 모두 놀란 표정이었으나 촌로들은 혀를 끌끌 찼다. “저 요망한 계집을 보라고, 가만히 있으면 옛 사람이 일러오는 서울이 이곳에 세워질 터인데 그만 그 꿈을 잃게 되지 않았나.” 모두 낙심의 눈빛뿐이었다. “저 여자를 동네에서 쫒아내어 버리는 것이 좋겠구만.” “그렇게 합시다.” 모두 흥분으로 고함을 쳤다. 그 때, 수염이 하얀 촌로가 나섰다. “무슨 소릴 하는가? 이것도 다 운명이야. 저 여자를 탓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일세. 왜냐하면 산을 그쯤에서 서도록 운명이 되어 있었고 우리의 마음이 지성을 다하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여자에게 모든 것을 덮어 씌운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란 말일세. 오직 우리가 이 일 때문에 일어날 재앙을 이제는 방지해야 하는 것만 남았으며 모두가 정성껏 천지신명께 기구를 하는 수밖에 없다네.” “그런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산이 걸어 올 것이란 것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고 알았을 것인데 모든 것을 잊은 채 고함을 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린 저 여자에게 동네 이름으로 응징을 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이 동네에서 추방을 해야만 모든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아니야,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일세.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면 저 산은 우리도 모르게 걸어 나와 이곳에 서울을 만들고 복을 주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필이면 저 여자가 빨래를 할 때 걸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며 누군들 자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저 여인처럼 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꼭 저 여인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만큼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우리에게 보다 많은 정성을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우리의 맑은 정성을 쏟으면, 저 산이 잠시 섰다가 다시 걸어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으니 우리는 조금도 동요가 없이 정성을 쏟도록 하세.” 촌로의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비수처럼 닿았다.

그리고는 그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정성을 쌓기 위해 동네가 제단을 만들며 법석 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이 조금만 더 걸어 나왔다면 이곳이 서울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참 원통한 일이다.’ 하고 모두 애석해 하였고 그보다 뒷 재앙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중에 별 탈이 없이 며칠이 흘렀고 어느 정도 실망스런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에 이 동네에선 변고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이 동네에선 선한 일을 했을 뿐 나쁜 일이라고는 없었는데 뜻밖에 살인사건이 터졌고 또 그 다음날엔 옆 동네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옆 동네의 집을 불태우는 등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산을 생각하고 그 산의 재앙이 나타난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개 골에선 이 동네 사람은 모두 악질적이며 상대할 사람이 아니고 정신 나간 사람뿐이라고 수군거렸으며 저만큼 떨어져 피하는 것이 예사였다. 신촌 사람들은 모두 두려웠지만 그 대책을 의논하게 되었고 무당에게 물으니 산이 걸어 나올 때 큰 나무가 따라 왔고 그 나무에는 굉장히 큰 지네가 살고 있어 그 독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사흘 동안의 정성어린 굿으로 인하여 모두가 평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굿은 마지막 밤에 절정을 이루며 문 지네가 속에 산다는 나무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북과 꽹과리 소리는 더욱 높아갔고 무당의 얼굴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무당은 신이 났다. 자꾸자꾸 돌았다. 그 때였다. ‘쿵’ 하는 천지가 무너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잠잠했다. 빙글빙글 돌던 무당의 걸음이 딱 멈춰졌다. 그리고는 무당은 긴 숨을 몰아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 앞에는 큰 지네가 나둥그러져 있었다. 무당은 외쳤다. 그리고는 뛰기 시작했다. “모두 보아라, 모두 보아라, 지네가 죽었다. 지네가 죽었으니 이제는 이 동네에 재앙이 없어지게 되었다. 모두 보아라, 모두 보아라.” 동네 사람들은 무당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큰 지네가 힘없이 뻗어 있었고 시커먼 연기 속에 불이 타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퍼지고 잠시 후 지네는 시꺼먼 재로 변했다. 모두가 긴 한숨을 토했다. ‘이제는 재앙이 없어졌구나.’ 이 일이 잇은 이후로 동네 사람들은 전처럼 선했고 살인이나 방화나 싸움이 없어지고 평안한 나날을 지냈다.

영지(影地)의 사연

유명한 화개장터에서 10리를 오르면 쌍계사가 나타나고 다시 화개천의 계속을 따라 10리를 오르면 둑길이 갈라지는 곳이 신흥리이다. 오른쪽 길은 의신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꺾어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이 칠불사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10리 길을 또 오르면 그 유명한 칠불사가 나타나고 그 입구에는 영지라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이 영지는 어버이들과 아들들의 애달픈 사연이 서려 있고 그 크신 부처님의 뜻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가야국 김수로 왕에게는 10왕자가 있었는데 큰 왕자는 김 씨로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 왕자는 허씨, 셋째 왕자는 인천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나머지 7왕자는 그들의 외숙인 보옥선사를 따라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한 다음 산음 휴시재를 넘어 의령의 수도산, 자굴산, 사물현의 와룡산과 구룡산을 거쳐 지리산에 기원전 101년에 들어와 지금의 칠불사 터에 운상원을 짓고 여기서 암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도하다가 기원전103년(수로왕 62년)에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성불하였던 것이다. 가야의 일곱 왕자가 입산수도하고 있을 때 수로왕은 출가한 이들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더구나, 허왕후의 간절함은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사다난한 국사를 제쳐놓고 아들을 보려고 지리산으로 갈 수도 없었다. 김수로와 내외는 심히 가슴 아픈 나날을 보냈다.

궁중에서 지리산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할 때 찢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왕과 왕비는 언젠가 한번은 아들들을 보기를 원했고 밤마다 먼 서쪽 하늘만 바라보며 그들의 평안을 빌기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왕 내외는 국내가 안정되고 어려운 일이 없자 아들을 찾아 나섰다. 뱃길을 따라 수 백리를 왔고 다시 섬진강을 따라 150여리를 왔던 것이다. 험한 산 속 인적은 드물고 물소리와 짐승 소리만 울려올 뿐 고요와 적막만이 있었다. 그들은 쉬었다. 그리고는 얼마나 남았는가를 알아보곤 또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산굽이마다 아들들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왕 내외는 너무나 느린 행렬을 탓하기도 했고 그 동안 얼마나 변했는가를 생각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칠불사 운상원이 보이는 산모퉁이에서 아들의 상견을 바라면서 사람을 보냈다. “왕과 왕비께서 뵙기를 원하시오니 왕자들은 마중하라는 대왕의 명이옵니다.” 신하는 크게 자란 왕자들을 보며 우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황자들은 기쁜 빛도 슬픈 빛도 나타내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서 전해 주시오. 출가한 자식은 뵈올 수 없으니 그대로 돌아가 주시라고.” 신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왕자들아 왕과 왕비와의 대면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닌가. 그는 다시 말했다.

“수륙의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오직 왕자님들을 보고 싶어 노심초사 감내하시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뜻을 거두시고 뵙길 바랍니다.” 간절하게 신하는 빌었다. 그러나 왕자들은 한결 같았다. “우리의 뜻을 전해 주시오. 나무아미타불.” 신하는 돌아와서 왕에게 고했다. “황공 하온 말씀이나 왕자님들이 뵙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왕은 놀랐다. “무엇이라고 했느냐? 다시 말을 해 보아라.” 신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왕자님들이 뵙기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돌아가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비가 말했다. “다시 가 보아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 길을 왔다고 하여라.” 신하는 다시 뛰어갔다. “뵙기 전에는 돌아가시지를 않겠다고 합니다. 왕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겠습니까? 한 번 더 생각하시어 만나 뵙도록 하심이 아들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하의 간곡한 말이었으나 왕자들은 싸늘했다. 우리들은 이제. 속세의 인연을 끊었노라. 인생은 허무한 것. 모든 것은 인연이요, 모든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돌아가 아뢰어라. 이곳엔 대왕을 만날 아들은 없다고.” 신하는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모든 것은 공즉시색이라 합니다. 하오니 만날 아들이 없다 하시면서 돌아가시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왕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에겐 깊은 우수가 얼굴에 나타났다. “꼭 얼굴이라도 보아야 한다. 얼굴만이라도.” 그는 신하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공즉시색이면서도 인연이라면 만나는 것도 또한 같지 않느냐? 가서 상면하도록 전하라.” 신하는 다시 왕자들에게 갔다. “뵙기를 원하십니다.” 왕자들은 모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신하에게 말했다. “이미 우리들은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인지라 결코 상면할 수 없는 터이니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보고 싶으면 모레가 보름날이니 그 날 밤에 산 밑에 못이 있으니 그 못을 보시면 저희들을 만나 보게 된다고 그렇게 전하여 주게나.” 말을 마치고 왕자들은 총총히 사라졌다. 신하는 다시 돌아와 그 말을 왕에게 전했다. 왕과 왕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사흘을 기다려 보름달이 뜨는 밤에 그 연못에 왔다. 그 연못에는 과연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었고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하지 않는가. 왕과 왕비는 눈물을 흘렸다. “몸 편히 잘 계셨습니까? 저희들은 부처님의 가호로 아무 탈 없이 무사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왕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염려하지 마옵소서. 뜻을 꼭 이루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들은 그토록 연모하던 정을 풀었다. 그래서 왕이 주련(駐輦)하던 곳을 범왕촌, 왕비가 있던 곳을 대비촌이라 하고 왕과 왕비와 왕자들의 상면한 연못을 뒷날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용추(龍湫)의 쌀 바위

불일폭포는 우리고장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난 폭포인 동시에 그 풍취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더구나 백학봉과 청학봉이 우뚝 솟아 있는 심산의 흥취는 또 다른 신비감을 주고 있다. 지리산의 그 웅대한 멋이 여기서 맺혀 그 극을 이룬 듯한 곳이다. 천 길 낭떠러지에 흐르는 비류(沸流)는 직하하여 소를 만들고 있으며 그 이름은 용소(龍沼)라 불리어지고 있다. 용이 서식한 이곳에는 또한 이상향의 전설도 있으니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풀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아득한 옛날 불일폭포 오른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옥수는 자연의 신비를 담아 용소로 떨어졌고 그 용소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 백학봉도 청학봉도 없을 때였으니까 무척 오랜 옛날이 아닐 수 없다. 이 이무기는 천년이 되면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불일암이란 암자가 있어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뇌성이 치고 벼락이 나무를 때리며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쳤다. 산천은 천지가 개벽되는 것 같이 무서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산이 쩍 갈라지고 용소에서 용이 푸른빛을 발하여 하늘로 오르고 땅은 마구 흔들리며 쾅쾅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비는 쏟아지며 뇌성은 이 골짜기를 가르고 있었다. 이윽고 비가 멎으며 뇌성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불일암에 있던 스님은 이제까지 무서워 꼼짝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방문을 열고 나섰다. 아! 이게 웬일인가? 이제까지 용소 옆에 하나로 서 있던 산이 두 개로 갈라졌고 곱게 흐르던 물줄기가 없어지고 천길 절벽이 생겼으며 그 절벽으론 물이 떨어지고 있어 없었던 폭포가 생겨났었다. 이 모든 변화에 잠시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깊은 절벽 밑으로 새로 물줄기가 났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언덕에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스님은 호기심이 일어나 절벽의 뚫어진 구멍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그곳엔 쌀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스님은 눈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보았다. 틀림없이 쌀이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부처님의 자비가 내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두 손을 합장하고 감사를 드리며 쌀을 부지런히 담아서 암자에 옮겼다. 뒷날 다시 그 절벽의 뚫어진 구멍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또 쌀이 나와 있지 않은가. 스님은 또 쌀을 암자에 옮겼다. 그라고는 부지런히 염불을 외우며 부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제까지 나무 열매로 생식을 하며 지냈던 스님은 이제 여유가 생겼고 이 쌀을 화개장에 팔아 다른 일용품을 사기로 했다. 하루는 쌀을 구멍에서 옮겨내고 뒷날은 장터에 내다 팔고 점점 불어나는 재산에 재미가 났다. 이제는 염불도 귀찮아졌다. 세속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구나, 주막집 아낙네의 눈웃음을 잊을 수 없게 되었으나, 승복을 입은 주제에 그 곳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안타까운 심정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쌀을 가져오고 내다 파는 일은 계속했다.

하루는 장터의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스님이 이렇게 조금씩 가져 올 것이 아니라 며칠 모아 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시면 수고도 덜고 목돈도 가질 수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거의 날마다 나르시는지 모르겠군요.” 했다. 스님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암자로 돌아왔다. 그는 그 날 밤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크게 판다면 반드시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장터 아낙의 말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날듯이 기뻤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스님은 구멍을 더 크게 뚫을 도구를 챙겨서 폭포로 내려갔다. 그는 열심히 구멍을 뚫고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뚫었다. 그리고는, 해가 지자 암자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또 그는 구멍을 뚫었고 닷새 동안이나 구멍을 뚫었는데 뚫은 구멍은 전 것보다 3배 이상 크게 되었다. 스님은 마음이 흡족했다. 내일부터는 3배로 쌀이 쏟아져 나올 것이니 이제는 큰 부자가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로 밤잠을 설치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스님은 날이 밝자 큰 쌀자루를 메고 절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크게 뚫어놓은 쌀 구멍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는 3배로 많은 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은 구멍 속을 보았다. 또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어느 도둑놈이 나 몰래 그 많은 쌀을 가지고 간 것이라고.’ 그래서 그 날 밤 스님은 그 쌀이 나오는 구멍 앞에 앉아 도둑을 지키고 있었다. 뜬 눈으로 도둑을 지켰지만 도둑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마음을 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틀림없이 많은 쌀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뒷날 사람들은 스님이 욕심이 많아 구멍을 크게 뚫었다가 그만 쌀이 나오지 않았으니 천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용이 하늘로 오를 때 백학봉, 청학봉이 생겼고 용추는 용소가 되었으며, 불일폭포도 생겼다. 그 쌀이 나온 구멍 곁의 바위를 용추바위라고 한다.

매봉재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언덕이다.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선사의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진감선사가 쌍계사를 창건한 후 쌍계사 후록에 국사암을 지어 기거할 때의 일이다. 진감선사가 국사암을 떠나 밖으로 나갈 적마다 한 마리 호랑이가 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고 그 호랑이는 진감선사가 문을 나서면 엎드리어 등에 타기를 바랐다. 진감선사는 그 뜻을 알아 매양 출입할 때에는 그 호랑이를 이 재에서 만났으며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해서 매봉재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칠불사 미타전

칠불사에 대웅전인 보광전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들이 침입하여 마타전에 불을 지르고 갔는데 그때 ‘음’하는 소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가 인근 산천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왜적이 물러 간 뒤 절을 살살이 살펴보았더니 보광전의 대들보에 땀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미타전은 물론 절의 중요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은 국혼유사라면서 서로 계구감축(戒懼感祝) 하였다고 한다. 이후 병자(1876)년 흉년에도 울었고 한일합방(韓日合邦) 때도 크게 울었으며 국가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소 울음소리를 3일 전에 듣는다고 한다.

반야를 짝사랑한 마야고

천왕 할매의 딸 마야고는 반야봉에 사는 남신 반야도사를 사모하였다. 애타게 기다려지는 반야가 좀처럼 가까이 오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마야고는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반야가 오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반야의 옷을 갖고 긴 머리칼 나부끼며 쇠별 꽃밭으로 달려갔지만 반야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제야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망과 애틋함과 어리석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환영을 자기에게 안긴 쇠별꽃이 지리산에서 더 이상 못 피게 하고 손수 지은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 숲속 여기저기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얼굴 비추며 아름답게 가꾸고 치장하는데 사용한 연못을 메어버리고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와 구상나무에 기상하는 풍란(환난)이 되었다고 한다.

선비샘

세석평전과 벽소령의 중간지점쯤 되는 덕평봉 남쪽 해발 1500m즈음에 있는 고산 샘이다. 수량은 풍부하지 않지만 일 년 내내 마르는 법이 없다. 옛날 덕평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이(季)씨 노인이 있었다. 가난하고 무식하며 생긴 것 까지 볼모양이 없어 모든 사람들아 이 씨 노인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멸시와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힘겹게 평생을 살았다. 평생소원이 양반이나 선비는 아니더라도 사람대접을 받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산 짐승가중과 약초 등을 지고 겨울 준비를 하려고 화개 장에라도 모처럼 올라치면 장꾼들은 이 씨 노인을 힐끔거리며 진기한 짐승 대하듯 하기 일쑤였다. 살아생전 소원을 이루지 못한 노인은 자식들에게 유언을 하기를, 지리산을 드나드는 사람들 이 잠시 쉬었다 가는 상덕평 샘터 위에 나의 묘를 쓰라고 했다. 이후 이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쉬어가거나 취사를 하면서 이 샘에서 물을 뜨려면 무릎을 꿇어야만 되었으니, 그 위에 있는 묘가 자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예를 받게 된 것이다. 생전에 그렇게도 받고 싶었던 사람대접을 죽어서나마 맘껏 받게 되었던 것이다. 후일 부근 사람들은 생전에 불우했던 이 씨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이 샘을 선비 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무 말 타고 원님코를 납작하게 한 아기 중

어느 날 하동원님이 칠불사에 왔다. 그 원님은 물론 유자로서 불교나 스님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항상 중들은 일을 안 하면서 놀고먹고, 사는 집은 그 고을에서 제일 크고 좋은 집에서 사는데 그것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즉 명당에서 사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아니 괜히 배가 아팠다. 아자방을 들여다보니 선정삼매에든 스님들이 하고 있는 모양이 각각이었다. 어떤 스님은 한 팔로 물구나무를 서있고, 어떤 스님은 한 팔로 교족정진을 하고 있고 어떤 스님은 가부좌를 한 채로 방구를 힘껏 뀌고 있기도 하였다. 원님이 보기에는 공부하고, 수도한답시고 하고 있는 꼬락서니들이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당장 잡아다 볼기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원님은 꾹 참고 조실과 주지스님을 불렀다. “너희들은 평생 하는 짓들이 먹고 자지 않으면 공부요, 도를 통하려는 것이 아니냐? 너희 무리 중에는 그 도라는 것을 통했거나 훌륭한 공부를 이룬 자도 있을 터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나와 내기를 하자꾸나. 이번 보름날 오시까지 하동 관아로 너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나무 말을 타고 동헌 마당을 세 바퀴 돌도록 하라 너희가 돌면 내가 너희들의 공부와 노력 등을 인정해주리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럴리야 없겠지만 사교에 빠져서 부모를 버렸으니 불효의 죄요, 힘써 일하지 않으면서 좋은 집에서 재물을 소비하여 호의호식하니 이 또한 나라에 죄를 짓는 것이니 죄를 엄히 물으리라. 너희가 보름날 관아에서 나무 말을 타고 마당을 돌지 못하면 절을 모두 비우고….” 이런 내기는 스님들이 이겨도 원님은 무엇 하나 손해되는 것이 없고 스님이나 절은 무엇 하나 득이 되거나 바뀌는 것이 없지만 만일 원님의 일방적이고 불공평한 요구를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모든 것을 잃어야만 되는 것이다. 사부대중이 모여 대책회의랄 하여 꾀를 짜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론은 보름날이 되기까지 모두가 부처님께 일심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름날 누구의 명이라 어길 수 있겠는가? 아침 일찍 고승부터 행자들까지 모두 하동 관아로 갔다. 관아의 마당에는 큰 나무 말을 만들어 세워 놓고 있었다. 원님 왈, “약속을 했으니 지키려고 왔구먼, 너희들은 평생, 도만 닦았으니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느냐?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누가 이 나무 말을 타겠느냐?” 며 음흉하고도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조실, 주지 노스님부터 일렬로 늘어선 스님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안절부절 하였다. 원님은 다시 두 번 세 번 채근을 하였다. “어찌 약속을 하고도 타려 하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들은 나의 요구를 다 듣기로 하였느냐?” 이 때 줄 끝에서 장난을 치고 있던 아기중이 원님 앞에 나서며, “이 까짓 일이면 소승 혼자라도 할 수 있겠는데 노스님들께서 나서실 것 있겠습니까?” 아기중이 원님을 보고 “원님께서는 우리를 사교의 무리라 하셨는데, 우리가 약속을 지키려 왔으니 원님께서도 약속을 지키시겠지요? 이 잘생긴 말을 타고 마당을 세 바퀴 돌겠습니다.” 원님께 굳게 다짐까지 하나 큰 스님은 더욱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원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조그마한 놈이 말이 많구나.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 않느냐, 이놈아! 저 말을 타고 마당을 돌지 못하면 네 놈뿐이 아니라 너와 무리는 모두 너의 죄를 알렸다.” 원님의 약속을 확인하자 아기중은 나무 말에 올라타더니 나무 말 엉덩이를 철썩 때리며 “이놈아! 빨리 가자 큰 스님이 걱정 하신다!”고 하고 정말로 나무 말이 마당을 돌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원님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하고 큰 스님은 부처님을 부르며 경찬해 마지않았다. 아기스님은 마당을 세 바퀴 돌더니 하늘로 솟구쳐 원님을 한 바퀴 돌고는 “스님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돌아가셔서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면서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스님들과 원님과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나무 말을 탄 아기스님이 서쪽 하늘에서 사라질 때 까지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기 스님은 문수동자가 현신한 것이라 한다. 지금도 칠불사에는 문수동자가 보이지는 않지만 상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장흥마을과 호랑이

장흥마을은 부춘과 신기마을의 중간 시내 건너에 있다. 장흥마을과 건너 산 중턱의 호랑이들과는 적당한 세력(가구 수와 호랑이 수)에서 균형이 이뤄 질 때만 공존을 할 수 있었다. 호랑이의 숫자가 너무 불어나면 마을 사람들은 호식이나 호환이 두려웠고 가구 수가 불어나면 땔감 때문에 호랑이가 깃들어 사는 수풀이 마구 베어져 나갔다. 호수가 불어나 건너편 산의 숲이 훼손되면 숲속의 호랑이가 사는 바위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1938념 겨울밤 건너편<호랑이 바위>에서 이상한 불빛이 치솟더니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불이 번져 하룻밤사이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비옥한 전답게 살기 좋은 온화한 곳이라 주민들은 합심하여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다시 마을이 형성되어갔다. 불의 재난이 있은 후 2년, 마을은 전과 같이 복구되었고 주민들은 마을 이름과 같이 오랫동안 흥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전과 꼭 같이 마을 전체가 불타고 말았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건너편 호랑이 바위의 호랑이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공포에 떨었고 결국 한 집 두 집 장흥을 떠나게 되어 마을은 결국 빈터만 남게 되고 말았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공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용두(龍頭)와 검두(劍頭)

용두마을은 화개에서 가장 늦게 마을이 형성되었지만 주변의 지형은 마을 이름과 걸맞게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 섬진강과 건너의 북섬과 옥녀봉(玉女峰)등의 지형이 <옥녀의 직금형>으로 옥녀가 베틀에서 비단을 짜는 형상이라 한다. 앞들 건너편 산이 옥녀봉인데 이야기인즉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로서 밤이면 지상으로 내려와 비단 짜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하루 밤은 비단 베 짜기에 너무 열중하여 밤샘토록 일하다가 아침 해 뜨는 줄도 몰라 하늘로 들어가지 못하여 상제의 노여움을 입어 북통을 든 채로 산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옥녀봉 앞의 작은 섬은 북섬이고 옥녀봉 아랫마을은 비단을 짠다는 직금(織錦 : 전남 광양시 다압면)마을이다. 용두 쪽에서 보면 옥녀가 섬진강 위의 형제봉을 향하여 베틀을 차려놓고 있다. 용두 앞들은 베틀의 <바디>에 해당한다. 실제로 <바디열> <바디들>로 부르고 있다. 옥녀의 높은 곳은 어딘가? 베틀의 용두머리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용두인 것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검두라고 바꾸어 부른 것이다. 결국 일제는 용두머리가 싫어서 칼로 용두머리를 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용두머리는 떨어지고 칼머리(劍頭)가 되었다고 한다.

나무오리가 잡은 절터

호랑이의 인도로 지리산 화개 골까지 무사히 온 선사는 주석할 곳을 찾아야 했다. 주석할 절터를 물색하기로 했다. 이때는 토착주민들도 얼마 되지 않았고 산세가 험하여 하늘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찾기도 하였다. 이에 나무로 오리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렸다. 세 마리는 혹시 후일을 위해 세 곳 정도의 절터를 잡아두려 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오리가 지금의 용강리, 운수리 지역을 두루 날아다니며 아래를 관찰하다가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선사 앞에 앉고는 뒤뚱거리며 선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화개 천을 건너 지금의 목압마을로 들어갔다. 주민들이 보니 이상한 나무오리 세 마리가 앞서고 남루하지만 위의 잇는 스님이 뒤따르자 모두 나와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무오리들에게도 알곡을 던져주자 맛있게 모이를 먹었다. 첫 번째 오리가 안내한 곳이 지금의 목압사 터였고 두 번째 오리가 안내한 곳이 지금의 국사암, 세 번째 오리가 안내한 곳이 쌍계사 금당자리였다. 첫 번째 자리는 100여 년 전 삼법화상의 옛터로 절의 흔적이 있었고, 두 번째 자리는 아늑하여 좋기는 하였지만 앞이 막히고 자리가 좁았다. 세 번째 자리는 툭 터진 전망과 빼어난 경치에 당우를 늘려가며 큰 사찰을 지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에 선사는 두 번째, 세 번째 자리는 우선 아껴두기로 하고, 첫 번째 자리가 삼법화상의 옛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무오리가 잡은 절터라고 해서 목압사가 되었다. 지금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목압마을을 목거리(목월이)로 부르는데 이는 나무오리 즉 목오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인데 진감선사께서 나무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음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글/김경연 관광해설사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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