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젖은 신발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젖은 신발
  • 하동뉴스
  • 승인 2020.06.09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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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아이들 운동화는
대문 옆 담장 위에 말려야지.
우리 집에 막 발을 내딛는
첫 햇살로 말려야지.

어른들 신발은 지붕에 올려놔야지.
개가 물어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높고 험한 데로 밥벌이하러 나가야 하니까.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셨지.
북망산천 가까운 사랑방 툇마루에
당신은, 당신 흰 고무신을 말리셨지.

노을빛에 말리셨지.
어둔 저승길, 미리 넘어져보는 거야.
달빛에 엎어놓으셨지.
저물어도 거둬들이지 않으셨지.

마지막은 다 밤길이야.
젖은 신발이 고꾸라져 있었지.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시인 소개】
이정록 / 1964 충남 홍성 출생.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외 다수. 김수영 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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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은 상징성이 매우 강한 물건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우리 몸의 일부가 돼서 이승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우리 곁을 떠나는 게 신발이니까요. 이 시는 “젖은 신발”을 말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생애가 어떻게 발원하고, 굽이치고, 잦아드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운동화는 대문 옆 담장 위에다 올려놓고, “우리 집에 막 발을 내딛는/첫 햇살로 말려”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는 우리집의 미래이자 희망이니까요. 어른들의 신발은 지붕 위에 올려놓고 뙤약볕으로 말린다고 합니다. 하필 지붕인 이유는, 그곳이야말로 밥벌이의 고단함과 위태로움을 은유하는 곳이니까요. 문제는 할머니의 신발을 말리는 방식입니다. 여기서부터 시는 부쩍 깊어집니다.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저녁 노을빛에 말리고, 다시 엎어서 달빛에 말리지요. 엎어진 신발을 통해 어둡고 외롭고 두려운 저승길을 미리 예행연습해보는 거지요. 달빛에 젖어드는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이미 이승의 물건이 아닙니다. 젖은 신발을 달빛에 내어놓고, 눈곱 끼고 짓무른 눈빛으로 저승길을 흐릿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시인은 할머니의 그 마음으로 우리더러 ‘지금-여기’에서 열심히 살라고 다그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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