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올해는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올해는
  • 하동뉴스
  • 승인 2020.10.27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는
                   윤중호

올해는 등나무꽃도 스쳐갔네
자글자글 눈으로 웃으며
‘헉’ 숨이 멎어 한참을 바라보던
동네 어귀 등나무꽃.

올해는 금강가를 거닐지도 못했네
반짝이는 은피라미떼 눈 맞추며
며칠씩 걷던 금강 원둑.

올해는 새벽 산길에 핀
쑥부쟁이 따라 건들대지 못했네.

우리 엄니, 부러진 어깨뼈 더디 아물어……

-시집 『고향 길』(문학과지성사, 2005)

【시인 소개】
윤중호 / 1956년 충북 영동 출생. 1984년 계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본동에 내리는 비』 『금강에서』 『청산을 부른다』, 유고 시집 『고향 길』이 있음. 2004년 9월 영면.
-----------------------------------------------------------------------------------------------------------------------------------------------------------------------------------------------------------

짬이 나면 오래 전에 사놓고는 잊고 있었던 시집을 꺼내서 읽어봅니다. 이 시집도 십수 년 전에 사놓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문득 눈에 띄어서 펼쳐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이 시집만 곱씹어 읽었습니다. 시를 읽으면 좋은 점은 언제 읽어도 현재형으로 읽힌다는 겁니다.
꽃을 감상하는 것도, 풍경을 느끼는 것도, 나를 돌아보는 것도 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헉’ 숨이 멎을 정도로 향기로운 등나무꽃도, 강가를 거닐다가 반짝이는 은빛 피라미 떼와 눈맞춤하는 것도, 새벽 산길에서 쑥부쟁이꽃을 만나 앞세우고 가는 산책도 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지요. 그런데 시인은 어머니의 부러진 어깨뼈가 쉬이 아물지 않아서 아무 것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가족이 아프면, 특히 어머니가 아프면 가지런하던 일상이 온통 헝클어져 버리지요. 늦가을 같은 쓸쓸한 시들을 남겨놓고 이 시인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은 그의 유고시집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봄이 어떻게 갔는지, 여름은 어떻게 갔는지, 가을은 언제 왔는지…. 어느새 11월이 코앞입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여유가 필요합니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답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