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1.05.1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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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다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民不畏威    민불외위
 則大威至    즉대위지
 無狹其所居  무협기소거
 無厭其所生  무염기소생

사람이 천지의 위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크나큰 위력이 닥친다. 그 처한 바를 소홀히 하지 말고, 그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노자 72장 참조>

못 죽어 사는 세상보다 더한 난세란 없다. 힘을 앞세우고 세상일수록 힘없는 쪽만 당하게 마련이다. 힘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강력이 그것이다. 자승 즉 자신을 무릅쓰는 힘이 강이고 남을 이기는 힘이 역이다. 그래서 성인은 강을 가까이하고 역을 멀리한다. 그러나 폭군은 강을 멀리하고 역을 가까이한다. 그래서 폭군이 권력을 휘둘러대면 백성은 못 죽어 산다는 말로 분을 푼다. 분하다 보면 외위 따위는 헌신짝처럼 되기 쉽다. 이런 참상이 곧 난세이다. 
『맹자』에도 <이력복인자 비심복야>라는 말이 나온다.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굴복시킴이 아닌 것이다. 오로지 힘이 모자라서 눈앞에서만 굽실거리는 척할 뿐이다. 되돌아서면 곧장 하늘도 무심타며 모진 원한을 품어대게 마련이다. 그러나 군림하는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생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외위하면 대위가 닥친다고 하는 것이다. 위력을 두려워하지 않음이란 학대를 두려워하지 않음이다. 학대를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해 그 학대에 항거하게 됨을 일러 불외위라 하는 것이다. 불외위는 불외학과 같은 말이다. 학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면 무서울 것이 없어진다. 생쥐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고양이한테 덤비는 법이다. 생죽음이 닥칠 줄 알면서도 위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돼 생죽음이 닥치고 만다. 생죽음을 빚어내는 위력보다 다한 것은 없다. 그래서 대위를 일컬어 형륙이라 일컫게 된다. 형벌로 죽임을 당함은 법을 어겨 빚어진다. 여기서 형벌이란 힘을 가장한 것이지 힘없는 자를 돌봐주는 그런 법이 아니다. 물론 형벌이 아닌 천벌도 있다. 천벌을 받아도 물론 생죽음을 당한다. 왜 소거 즉 삶의 처지를 옹색하게 말라 하겠는가? 처지가 옹색하다고 아등바등함은 천함을 싫어하고 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비천하다면 비천한 대로 천지를 벗 삼아 마음 편히 살면 밤마다 두 다리 쭉 뻗고 악몽 없이 푹 수도 있다. 왜 노자는 당신이 나를 소라고 부르면 소가 되어주고 말이라고 부르면 말이 되어주겠다고 했겠는가? 살아가는 처지를 두고 안절부절 않는 자유로움일 터이다. 그러나 비천함을 면해보고자 잔꾀를 부리고 부려 발버둥치다 보면 스스로 제 몸을 둘둘 감아버리는 옥쇄를 당하고 만다. 제 손에 든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얼간이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세상을 원망하면 할수록 그만큼 제 숨통이 막힌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서 제 처지를 싫어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소생 즉 살아가는 바를 싫어하지 말라 하겠는가? 제 삶을 싫어함은 가난을 싫어하고 부유하기를 바라서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난을 버리고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발악하게 되면 이 역시 제 숨통이 막히고 만다. 한 홉의 땀을 흘렸다면 그 한 홉의 보람으로 살고, 한 되의 땀을 흘렸다면 그 한 되의 보람으로 살고, 한 말의 땀을 흘렸다면 한 말의 보람으로 살고, 한 섬의 땀을 흘렸다면 그 한 섬의 보람으로 살면 저마다의 소생을 만족하는 셈이다. 누가 부자란 말인가? 그 정답은 바로 지족이라는 말씀이다. 만족할 줄 알면 그 순간 누구나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탐욕이라는 것은 한강수를 다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으니 인간은 늘 생죽음을 등에 업고 사는 편이다. 이런 생고생을 면하고 싶다면 자신의 소생 즉 제 삶을 싫어하지 말라는 것이다. 탐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것인가, 그 짐 덩어리를 버리고 편안히 살 것인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들리지 않는

 視之不見名曰夷    시지불견명왈이
 聽之不聞名曰希    청지불문명왈희
 搏之不得名曰微    박지부득명왈미

그것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음을 일컬어 이라 하고, 그것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음을 일컬어 희라 하며, 그것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음을 일컬어 미라 한다. <노자14장 참조>

옛날 사람과 오늘날 사람이 달라진 것은 몸뚱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일터이다. 물론 작았던 평균 키가 더 커졌다는 정도의 변화는 있지만 두 개이던 귀가 세 개로, 하나이던 입이 두 개로 사람의 몸뚱이가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가짐을 옛것과 홱 달라진 것이 분명 사실이다. 우리의 옛날 마음가짐은 심물에서 마음을 앞세우고 바깥것을 뒤로 하여 마음이 근본이고 바깥것은 말단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옛날 사람한테 요새 말하는 물질은 몰랐던 낱말이다. 물질이라는 낱말은 ‘Matter'를 옮긴 새로운 낱말이다. 요새는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알아챔을 일러 지성이라 하는데 이는 옛날 우리가 말했던 지성과는 뜻이 완전히 다른 낱말이다. 우리가 옛날에 썼던 지성은 지천을 뜻해 지성을 닦음을 일러 사천이라 하였다. 마음의 근본을 앎은 하늘을 앎이고 그 성을 닦음은 하늘을 섬김이라고 했다. 그래서 양심 즉 마음을 닦음은 곧 하늘을 섬김이 되었다. 이는 곧 하늘은 마음이고 마음은 하늘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도덕이 인생의 지남 즉 길잡이가 됐었다. 이제는 도덕은 낡고 뒤진 옛것인지라 잊힌 셈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오로지 과학의 시대인지라 비수의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지성을 앞세우는 물질의 시대가 되어 ‘있는 것’만 관심거리일 뿐 ‘없는 것’은 온통 관심 밖인 꼴이다. 그래서 있는 것은 없는 것에서 생긴다는 생각은 이제 턱없어지고 만 셈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즉 물질로서 검증되고 증명되어야 드디어 인정되는 세상이다. 이처럼 도덕을 인간이 멀리하여 뿌리친 셈이지만 그렇다고 도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자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새 말하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자연이라 일컬어 알고 있지만 도덕이라는 자연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음을 이라하고 들리지 않음을 희라 하며 잡히지 않음을 미라한다. 이 이희미란 다른 아닌 도의 짓 즉 조화를 일컬어 풀이하는 말씀이다. 요새는 도생천 즉 도가 우주를 낳았다고 말하면 헛소리라 손사래치고 물질의 근원은 힉스입자라고 해야 현대과학의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음전기 양전기하면 사살이고 음기-양기라고 하면 헛소리라고 비웃으려 한다. 도덕의 도를 생기라 하고 그 생기를 일기라 하며 그 일기가 음양을 낳고 음양이 행하는 짓을 일러 덕이라고 하면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 웬 뚱딴지같은 소리 하냐고 비웃으려 한다. 그러나 세포 속의 물이 소금에 의해 수력발전소 같아져 발전해야 목숨이 유지되니 물이 목숨의 근원이라고 말하면 과학적이라고 끄덕이고 세상 만물치고 일음일양의 조화가 아닌 것이란 없다고 하면 낡고 틀린 소리로 치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과학이 증명한 전류나 옛말인 일음일양이나 기의 흐름을 말하는 것은 같다. 기라 하면 헛말이고 에너지라 하면 참말이 되는 세상이다. 기가 흐르면 살고 기가 막히면 죽는다고 허면 헛소리이고 에너지가 흐르면 살고 멈추면 죽는다고 하면 옳다는 게다. 보여야 하고 들려야 하며 만져져야 검증되고 증명되어야 인정되는 세상이 곧 물질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인지라 도덕을 헛소리처럼 들으려 하지만 도덕은 인간하고 상관없이 우주의 출입문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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