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채병덕 참모총장 부관이 간첩이었다.
 [노년의 고동소리] 채병덕 참모총장 부관이 간첩이었다.
  • 하동뉴스
  • 승인 2021.06.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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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6월이 되면 하동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채병덕(蔡秉德) 장군 생각이 난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33세로 국군 최고의 직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한데 그의 6·25때 행적이 참으로 아리송하고 불가사의하다. 경위를 한번 따져 본다. 1950년 6월 10일. 북한군 남침 개시 15일전, 대한민국 육군은 전방 중화기와 차량 절반을 정비를 핑계로 모두 인천 부근 부평으로 옮기도록 채병덕은 명령했다. 같은 날 38도선 전선에 포진한 최전방 연대급 부대를 이동 배치하고 전방 3개 사단장 전보 발령과 함께, 육군본부 작전국장, 차장, 과장까지 자리바꿈하는 인사 단행, 6월 24일 정오를 기해 전방 경계령 해제. 30% 범위의 장병 휴가·외출 실시. 같은 날 서울 육군회관 준공식에 육본 참모총장 이하 작전국장, 차장, 과장, 사단장 등 군 수뇌부 모두 참석, 밤 10시까지 뒤풀이 파티. 익일 새벽 즉 6·25 당일 2시까지 고위 핵심 지휘관들 국일관에서 2차 술 자리. 군 수뇌부 술에 취해 전쟁 발발 비상소집 불능, 인민군 38선 돌파 여섯 시간 30분 뒤에야 국군 지휘부 사태 파악, 국군 최고 통수권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6월 25일 10시까지 비원에서 한가하게 느려놓은 낚시 줄 찌만 노려보고 있었다. 

 채병덕이 술에 취해 국군통수권자와 대화 불능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네시 전투 개시와 동시에 알아챘다. 미국 통신사 기자가 옹진에서 38선 넘는 북한군 목격, 워싱턴에 즉각 타전. ‘한반도 전쟁 발발!’. 지구 반대편 미국 대통령이 전투 당사국 한국 대통령 보다 무려 여섯 시간 앞서 사태를 인식했다니,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다.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는 국군의 모습은 장님이 횃불 들고 헤매는 꼴이었다. 부대 이동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국군은 지형이 낯설었다. 군 장비를 후방으로 빼 돌려 버렸으니 기동력을 잃은 국군은 적군 앞에 발이 묶여 적의 총구 앞에 서있는 형국이었고, 미군이 남기고 간 엄청난 장비와 군수품들을 고스란히 북한군에 넘겨주고 빈손으로 죽거나 포로가 됐다. 갓 부임한 육본 지휘부 간부들은 부하도 못 알아보고 갈팡질팡, 명령 전달이 불가능했다. 6월 24일 휴가와 외출을 보낸 것은 장병들 사기가 떨어졌고, 휴가 장병에게 지급하던 건빵이 남아 넘쳐 그걸 소모하기 위해서였다니 소가 웃을 일이었다. 육군회관 준공파티 2차 술판은 동양통신 편집국장 정국은(鄭國殷)이 베풀었다. 정국은 채병덕 참모총장을 술떡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목표였다. 술값은 정국은이 계산했다. 북한은 국군 최고 사령관을 술에 저려 놓고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채병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멍청해진 그를 살려 역이용 하는 게 작전상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정신 줄만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채병덕의 이적(利敵) 작전 가운데 백미는 곧 한강다리 조기 폭파였다. 그는 막대한 군장비와 보급품을 안고 버티는 국군은 버려 둔 채 먼저 한강을 건너, 최창식(崔昌植)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 28일 새벽 두시 문제의 한강 다리가 깨졌다. 북한군이 할 일을 국군이 했다.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 저지에 목숨을 걸었던 국군 6개 사단이 흩어지고 말았다. 육군의 태반인 장병 4만 4천여 명이 끌어안고 있던 엄청난 군수품을 인민군의 손에 넘겨 준 채 죽거나 항복했다. 사실상 대한민국은 망해 무너졌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한은 한강 다리를 조기에 폭파, 정부와 육군 주력부대를 한강 이북에서 섬멸하고 전쟁을 끝내려했던 것이다. 불쌍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만 9월 21일 비밀리에 총살 당했다. 명령을 수행한 최창식이 무슨 죄가 있었나?. 6·25 당시 채병덕의 부관은 육군 병적에 그 이름이 없는 나엄광 육군 중위, 그는 채병덕을 공작했던 남로당 간첩이었다. 채병덕이 술에 저려 잠자리에 쓸어 졌을 때 비상 전화 코드를 뽑아 버렸다. 한강교 조기 폭파 작전은 그의 계략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는 한강교 폭파와 함께 그날로 종적을 감춰 버렸다. 채병덕에게 2차 술판을 벌려 주었던 정국은도 간첩으로 체포당해 1954년 2월 19일 처형 되었다. 1950년 7월 27일, 채병덕이 총격 당한 날, 나는 동네 친구들과 소를 먹이려 뒷산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소를 풀어 놓고 산마루로 올라가 하동 읍내를 바라보며 놀았다. 읍내 군데군데 폭격을 당해서 그런지 연기가 솟고 있었다. 뒷날 읍내 소재에서 채병덕 국군 총참모장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철이 없던 때라 인민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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