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必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必
  • 하동뉴스
  • 승인 2021.09.1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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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상우

비가 오니까 비가 온다
비가 오니까 비가 온다

백중날 오후 내내 난 이런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다

낙숫물 듣는 좌대 아래
눈 부릅뜬 고등어가
혼백 없이 누워 있다

神처럼

-시집 『필』(파란, 2021)

【시인 소개】
채상우 / 경북 영주 출신. 2003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멜랑콜리』 『리튬』 『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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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시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름지기 시라면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든지 위로해주든지 깨달음을 주든지 해야지 이렇게 독백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게 무슨 시냐고 말입니다. 아무튼 요즘 시들은 재미없다고 불평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시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반은 맞다는 건 요즘 시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데 대해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은 틀렸다는 건, 요즘 시를 아주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재미있고 감동적인 시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의미가 심오하고 내용이 감동적이거나 위로가 돼서 우리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노래가 좋아서 부르듯이,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해서 좋아하는 시도 있다는 거지요.
이 시도 그렇습니다. 특별한 감동도 위로도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냥 비 내리는 백중날 오후에 “눈 부릅뜬 고등어”처럼 “혼백 없이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비가 오니까 비가 온다”처럼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이런 걸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비멍’이라고 합니다. 비를 바라보며 ‘멍때린다’는 뜻이지요.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도 그냥 좋은 시가 있습니다. 이른바 ‘시멍’하기 좋은 시입니다. 시를 즐기는 한 방법이지요.

(김남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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