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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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1.11.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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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아니라 영험이 깃든 ‘산신령’이다 

 [문암송]별 다른 기대도 없이, 무심코 들렸던 사람들은 나무의 말할 수 없는 위용에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이런 나무를 보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나무가 아니라 ‘산신령’이다. ‘문암송(文岩松)’. 경남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에 있는 수령이 600여년으로 추정되는 노송이다. 1985년 경상남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돼 오다가 2008년 3월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승격했다. 문암송은 높이 12.6m, 장골 두 어명이 안을 만큼이나 넓은 둘레는 무려 3.2m다. 이렇게 큰 소나무는 좀체 보기 힘들단다. 아미산 중턱 큰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어, ‘이럴 수가’란 감탄이 터지고도 남는다. 바위 밑으로 몇 백년 동안 또아리를 튼 한 마리 용처럼 뿌리들이 굽이치고 있을 것이다. 

문암송은 앞에서 바라보면 평평한 바위 위에 마치 고대 전설 속 선인이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터앉아 있는 듯한 기이한 모습이다. 신비롭다, 영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문암송 앞으로는 드넓은 악양 들녘이 펼쳐져있고 그 건너 맞은편에는 최참판댁이 아슴푸레하게 보인다. 눈을 돌리면 섬진강 물길이 휘돌아가고 있다. 더러는 바위를 둘로 쪼개면서 우뚝 솟아 오른 문암송을 보고 남성미가 느껴진다지만 문암송의 신비스러움은 그런 미적 가치를 뛰어넘는다. 옛날부터 문인들은 문암송을 즐겨 찾고 또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함께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창한 봄이면 마을 사람들은 좋은 날을 택하여 나쁜 귀신을 쫓아내는 제사를 나무 밑에서 지내고 하루 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지금도 인근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암송계가 있고, 해마다 고사(告祀)를 올리고 있다.

-춘삼월 소나무 아래 봄맞이 기원제가 열리고, 꽃지짐에 꽃놀이까지

[금암에 끝순이가 심은 소나무?]봄날 마을사람들이 소나무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때문일까. 이런 옛 이야기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해마다 청명 무렵이면 축지리 마을 사람들은 바위를 뚫고 산 정상으로 뻗고 있는 아미산 소나무 아래서 봄맞이 기원제를 지냈다. 제를 지낸 뒤 마을 사람들은 꽃놀이를 하며 하루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기원제와 함께 춘삼월 꽃놀이였다고나 할까. 어느 해인지 정확치는 않다. 신라 때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하는데 정확치 않다. 끝순이 아비는 돛단배 타고, 떠난 지 2년이 넘었지만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매화꽃 피고 난 뒤 살구꽃 복숭아꽃 터지는 청명 아침이었다. 

동네 아이들 몇이 마을 고샅길을 뛰어다니며 “문암으로 모이라 캅니더” 연통을 나르고 쫒아다녔다. ‘김끝순’이란 처녀가 혼자 살았는데, 그의 집은 딸만 12명이었다. 소작농이었던 끝순이의 아비는 2년 전 행상선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여태 소식없는 사이에, 1년 전쯤 엄마와 형제 모두 괴질로 죽어버렸다. 이름이 끝순이었지만 끝내주게 이쁜 것도 끝순이었다. 떠난 아버진 돌아오지 않고, 동네에서 빨래며 심부름을 하고 근근히 살아가던 끝순이었다. 이곳 아미산 뒤에는 ‘문암’이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청명에 고사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제를 지내고 나누어 먹었고, 동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날을 새는 날이었다. 끝순이는 난감했다. 먹을 것도 없는 판에 내놓을 것이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문암 아래엔 마을 사람들은 벌써 모여 있었고, 끝순인 생각다 못해 제물 대신 가던 길에 진달래며 복숭아꽃이며 이쁜 꽃 13종을 꺾었다. 한 송이는 돌아가신 엄마를 위한 것, 한 송이는 큰언니....그리고 한 송이 돌아올 아버지를 위해....문암송 바위 위에 꽃이 놓였다. 끝순이가 불쌍하다며 끌어안고 우는 동네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난해 괴질 때문에 올해 문암의 잔치는 흥이 나지 않고 우울했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동네잔치는 끝나버렸다. 끝순인 문암을 돌고 또 돌았다. 할 일도 없었고, 집에 들어가 봐야 반겨줄 이도 없었다. 끝순이는 근처에 손바닥만한 소나무 하나를 캐 문암 바위 갈라진 틈에 심어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 소나무는 내 키보다 더 커겠지...” 그날 밤 끝순이의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더위 피할 나무가 없었는데 내 자리에 그늘을 만들어줬구나. 보름마다 너가 소원하는 14가지의 꽃이 필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닌가. 끝순이의 아버지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름이면, 11명의 끝순이 언니들과 어머니가 곱게 차려입고 이곳에서 춤을 추었다 한다. 
끝순이를 빼고, 부모와 형제를 합치면 13명인데, 왜 산신령은 14가지의 꽃이 필거라 했을까. 나머지는 끝순이의 신랑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름에 꽃 한 가지를 두면, 한 명이 보이고, 두 가지를 놓으면 2명이 보이고, 3명이면....

-악양엔 큰 부자의 고택이 2곳이다. 하나는 조씨 고가, 하나는? 

[조씨고가]조씨 고가를 찾아나선 길, 두 번 놀랬다. 골짜기 안에 이리 큰 마을이 있었나 싶어 놀랐고, 예전에는 지금의 몇 배로 더 컸다하여 놀랐다. 악양엔 큰 부자(?)가 둘이 있었다. 고가로 남은 조 씨 집안과 평사리에 참판을 지낸 최참판댁이다. ‘악양’이라더니, 역시 ‘볕이 잘 드는 땅’답게 악양 면소재지 정동리는 품 안에 따뜻하니 폭 안겨있는 듯하다. 올망졸망하게 길 따라 이어지는 풍경들이 하도 정겨워 금방 친근감이 드는 곳이다. 악양 삼거리에서 살짝 돌아가면 정동면 상신부락에 ‘조씨 고가’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온다. 조금 찾기가 어렵다. 안내판을 따라 길 안쪽을 더듬어 들어가면 말마따나 고래등 같은 집이 나타난다. ‘만석지기 집은 이렇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최참판댁과 비교하면 그리 크지는 않다. ‘조씨 고가’보다 ‘조 부잣집’으로 통하는 이 집. 조선 때 3대가 영의정을 지낸 집안이었다. 신문물이 마구 밀어닥치던 1876년께, 조재희라는 사람이 중국과 무역을 하여 대박을 터뜨려 ‘왕창’ 돈을 벌어들이자, 1200여 평의 규모로 집을 지었다고. 하이고 매나, 완공까지 무려 1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하니, 참말 만석지기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혁명군과 민포군의 치열한 접점 끝에 이 집에 불이 났는데 꺼지지도 않고 사흘 밤낮동안 탔다고 한다. 현재의 집은 그 뒤 다시 복원한 집으로 안채만 남아있다. 아랫 마당에는 연못 터가 있다. 이곳 ‘조부잣집’이 소설 ‘토지’ 속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라는 말도 있어, 최참판댁을 찾는 관광객들이 평사리에 들린 후 이곳까지 찾는다. 더러는 최참판댁인 줄 알고 오는 이도 있다고. 소설이지만 최참판댁도 만석지기 부자다.

-위안부 최초 증언 고 정서운 할머니의 한이 서린 곳...‘사과를 받고 죽어야 하는데....’

[취간림]악양면 정서리에 있는 ‘취간림’에는 인간의 귀함과 존엄성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비석이 있다. ‘고(故) 정서운 할머니...’ 일제강점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고발한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이곳에 있다. 일본이 종군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자 할머닌 “내가 종군위안부였다”며, 눈물과 용기로 자신을 내던진 첫 우리들의 어머니였다. 이곳은 정서운 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비는 5개월에 걸쳐 모금 운동을 벌인 뒤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기 위해 건립됐다. 일본이고 전쟁이고를 떠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역사에 휘말린 인간이 얼마나 파괴 되고, 얼마나 짓밟힐 수 있는가를 역사란 이름으로 보여주는 곳이 이곳이다. 정서운 할머니는 14살, 그 어린 나이인 1937년 당시 일본군 주재소에 갇힌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이장의 말에 속아 일본으로 가게 되고 위안부가 된다. 평생을 고통으로 사셨던 할머니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대만, 중국 광둥성, 태국, 싱가포르 사이공 인도네이아 수마라이에서, 무려 8년간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해방 후 싱가포르 수용소에 있었고, 귀국 후 1991년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맞서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하며, 세계를 경악시킨 주인공이셨다. “없다. 없다”고 할 때 홀연히 “내 가 그 종군위안부였고, 성노리개였다”고 떨쳐 일어난 분이다. 중국 베이징(北京) 세계여성대회 등에서 활발한 증언활동을 하다 2004년 2월26일 7시30분  81세의 나이로 눈물나는 삶을 마감했다. 정 할머니의 마지막 육성을 들었다. “내가 죽기 전에 꼭 바라는 바는 다른 게 아니고 우리 문제를 확실하게 판결 짓고, 확실하게 놈들한테 사죄 받고, 그리 할라고 하는데 내게 죽으면 어짜꼬.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못보고 억울해서 내가 어찌 눈을 감을꼬.....”

취간림(翠澗林)은 ‘악양동천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악양천의 중간지점에 물을 막는 역할을 하도록 나무를 심어 가꾼 곳이다. 이곳에 취간정이 건립된 뒤 이 숲을 취간림이라 부르게 됐다. 또 이곳을 기점으로 면소재지인 정서리와 정동리로 나뉘어 진다고, 세월의 흐름속에 정자는 없어졌고, 재일동포 홍갑동 옹이 사재를 털어 팔경루를 건립 기증했다. 정서운 할머니를 기억하며 잠시 들려 묵념하고 가야하는 공원이다.

-악양의 태양이 만든 위대한 열매, ‘아 악양대봉감이여’

[악양 대봉감] “대봉감 아이스크림, 들어나 봤나?” 크고 탐스런 대봉감을 통째로 비닐로 봉하여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한여름 갈증 날 때 꺼내어 작은 숟가락을 살살 녹여 먹는 맛은 흔한 말로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다. 맛도 맛이지만 요즘 같은 웰빙 시대에 아이들 간식으로 ‘딱’이다. 화학첨가물이 들어있지도 않고, 비위생적인 공정과정을 거치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 손쉽게 얼려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대봉 감의 맛. 미식가들조차도 혀를 굴려 아껴 먹는다는 그 맛은 단연 ‘악양 대봉감’이 으뜸이다. 타 지역의 대봉감보다 훨씬 비싼 값인데도 없어서 못 판다고 하니, ‘아, 대봉감, 대봉감이여 영원하라 팍팍!!’ 악양 대봉감이 뛰어난 이유는 ‘햇볕이 잘 드는’ 악양의 기후 조건 때문이다. 풍부한 일조량은 때깔과 탐스런 모양을 만들고,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의 맛을 빚어냈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지금은 ‘전통과일 정부품질인증’을 획득하여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악양 대봉감은 ‘명품 대봉감’으로 알려져 있어 ‘한 집에 대봉 감나무가 20그루만 있으면 일 년 살림살이는 걱정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생산 시기는 해마다 10월~11월이며, 연간 생산량이 1400여 톤이나 된다. 악양은 대봉 감의 시배지로 전해지고 있다. 악양 서북쪽 축지리 대봉감마을에서는 12월 초까지 소축마을에 체험장을 마련, 관광객을 대상으로 감 관련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또 악양면에서는 섬진강변 평사리공원에서 11월이면 대봉감 축제를 열어 대봉 감·단 감따기, 곶감 만들기 등 다양한 행사로 관광객의 발길을 잡고 있다.

▲악양농업협동조합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288  (055)883-3014 
▲악양 대봉감 영농조합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274-3  (055)883-3282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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