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2.04.1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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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다.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絶學無憂(절학무우라)

絶學無憂(절학무우)
唯之與阿(유지여아)
相去幾何(상거기하)
善之與惡(선지여악)
相去何若(상거하약)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예함과 응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선함과 악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노자 20장 참조>

지금 인간세는 이욕만을 앞세우는 경매장같이 되고 말았다. 한 물건을 두고 값을 제일 많이 쳐주는 쪽에 낙찰시켜주는 경매장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우리 쌍을 바라보는 초점을 잡아볼 수 있다. 별의별 근사한 술어들로 우리의 귀를 현혹하지만 그 모든 속셈은 인간의 이욕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쪽에 그 초점이 맞춰지는지라 같은 이기일지라도 사람의 이욕부터 사로잡지 않거나 못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 버린다. 이런 지경에서 학문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이 오로지 이욕과 이기만을 부채질하는 배움만을 너도나도 쫓아 나서려 하니 학문도 이기로 탈바꿈해야 살아남게 되어간다. 학문에 상아탑은 이제 없다. 이른바 학문이란 이욕을 충족시켜 줄 방편을 찾아주는 앞잡이로 나서라고 세상이 강요한다. 이 마당에 이욕을 쫓는 배움을 끊어라하면 뚱딴지같은 소리로만 들릴 터이다. 그런데 왜 절학하라 하나? 무우를 누릴 수 있기 까닭이다. 근심걱정이란 내 피를 말리고 내 마음을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 들들 볶게 하는 놈이다. 이런 무우를 하루에 단 한 순간만이라도 누리고 싶다면 분명 절학이 절실하다. 『논어』에 보면 <공자께서는 조이불강하시고 익이불석숙 하셨다>고 한다. 낚시질은 하되 주낙질은 아니 하고 오니에 끈을 맨 화살을 날리되 졸고 있는 새를 쏘아 잡지 않았다는 게다. 미끼를 문 물고기 한 마리를 낚을지언정 한꺼번에 여러 마리를 낚겠다는 탐욕을 내지 말 것이며, 주살질로 날아가는 새를 사냥하되 앉아서 졸고 있는 새를 사냥해 쉽게 취하려 하지 말라. 물고기 하나를 낚자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날아가는 새를 잡자면 어렵고 힘들겠지만 자고 있는 새를 쏘아 쉽게 잡을 생각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씀은 쉽게 생각하고 탐욕내지 말고 자기를 닦아 <도문학 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 묻고 배우는 길을 가라. 왜 도문학 하는가? 어짊을 묻고 배우는 길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호학하라 한다. 『노자』에는 <절학무우> 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호학>을 하지 말라 함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면 그럴수록 마음고생이 불어난다고 본 것이다. 인을 배우자고 인인하다 보면 그 인 탓으로 마음이 근심걱정에 휘말리는데, 자신이 어질자고 애써서가 아니라 그 인에 관한 학식이 모자라면 궁궐에 드는 말을 탈 수 없기 때문에 그 인을 알자고 마음을 태워 조바심내야 하니 근심걱정이 태산 같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의를 버리고 그것을 취하게 해준다는 교리도 버리면 따라서 무심해져 자연에 맡기고 편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편한 삶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스스로 솔직하게 자문하게 하는 말씀이 바로 <절학무우>라는 말씀이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이욕의 달리기를 멈추고 내가 나를 만나 본 적이 있는가?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거리가 없다고 함은 이욕을 차지하고자 몸부림치지 말라 함인지라 <절학무우>를 되새기며 살수록 스스로 재촉한 근심걱정을 없애고 자유를 누릴수 있다. 어차피 이욕의 학식을 떠나 살 수 없는 세상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 하수인으로 몰아붙이면 마음이 결국 새장 속의 새처럼 되고 만다. 훨훨 날아다녀야 할 인생을 빼앗기고 이욕의 창살 속에 가두는 학식의 종노릇을 하루에 한 순간이라도 그만두고 자신을 무심하게 할 함이 여기 절학이다.


-해치지 않는 자연이 바로 네 어머니
 天之道(천지도라)

天之道利而不害(천지도리이불해)
聖人之道爲而不爭(성인지도위이부쟁)

자연의 도는 이롭게 하되 해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위하되 겨루지 않는다. <노자 81장 참조>

대야에 발을 씻으면 땟물로 씻지만 시냇물에다 발을 씻으면 오로지 새물로만 씻는다. 천지도 즉 자연의 이치 그것은 흘러가는 시냇물같이 모든 것들은 늘 변화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유수를 보면 자연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상선약수라 한다. 상선이란 자연을 칭송함이다. 자연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 본래 선이란 상도를 그냥 그대로 따름이다. 영락없이 상도를 그냥 그대로 따름을 찬미하여 상선이라 한다. 그 상선이 물 같다니 물이야말로 천지도를 그냥 그대로 닮고 있다는 말이다. 공자께서도 냇가에서 감탄했다. “지나가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이는 자연을 읊음이다. 산 것이면 그 무엇이든 다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는 출생입사 이 네 자로써 새겨 헤아릴 수 있다. 생이 나와서 사로 들어감이 천도인지라 그것이야말로 흘러가는 물 같다. 두보도 “천지도 부평초라” 읊었다. 흘러가는 물 위에 뜬 풀잎이 아닌 것이란 천하에 없다. 그런데 그 생사의 변화 사이를 이롭게만 해주되 해치지 않는다고 노자께서 찬미한 자연의 이치란 상도의 조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시작을 일러 어머니라고 노자께서 불러놓았다. 어머니야말로 이이불해의 화신이 아닌가! 갓난애를 가슴에 안고 젖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롭게 해주되 해치지 않는다고 천도를 <천하모>라고 비유한 노자의 마음을 살펴 새기고 헤아려 깨우칠 수 있는 일이다. 자연은 이해를 둘로 나누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은 이롭게만 해주는 일도 없고 해롭게만 해주는 일도 없다. 대인은 자연이 이러함을 알고 소인은 그런 줄을 모른다. 그래서 소인의 심사는 변덕이 죽 끓듯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면서 미운 놈 고운 놈 갈라서 저하고 같은 쪽이면 이롭게 하고 다른 쪽이면 해롭게도 하는 짓을 소인은 서슴지 않고 범한다. 이래서 소인은 결코 편애하지 않는 자연을 이기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소인은 성인을 알려들지 않고 오히려 얕보고 업신여긴다. 성인은 이롭게만 해주고 해치지 않는 자연을 그대로 본받기 때문에 오로지 성인은 위이부쟁 한다. 도와주되 남들과 다투지 않는 성인을 본받는 대인은 물 한 모금도 고마워한다. 장자가 이슬만 받아먹고 사는 선인이 막고야산에 산다고 우화 해놓은 것은 천도를 따라 살지 않는 인간을 나무라기 위해서이다. 이슬만 먹음이란 법자연 할 뿐임을 나타냄이다. 자연을 본받음이란 이롭게 하되 해치지 않음이고, 이러한 본받기는 바로 성인의 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롭게 함은 곧 위해줌이다. 위해만 줄 뿐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으니 네 탓이냐 내 탓이냐 아옹다옹 겨울 일이 없으니 부쟁이다. 자연이 불해하니 성인도 부쟁한다. 불해나 부쟁이나 다를 바 없다. 마치 산속의 옹달샘 물을 산새도 마시고 산토끼도 마시고 노루도 마시고 초목도 마시고 저마다 삶을 누려서 이로울 뿐 해로움이 없는 것처럼 성인의 도 역시 다를 것이 없다. 공해로 지구가 병들어간다고 인간들이 아우성친다. 살지 못하게 하는 이 공해는 사람이 짓는 재앙이지 천지 때문이 아니다. 한강의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는 꼴이 자주 일어남은 사람들이 해로운 짓을 하여 자연인 한강수를 독수로 둔갑시켜 물속의 모든 목숨을 떼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뿐이다. 이 땅덩이에서 못살게 하는 짓은 사람만 저질러댈 뿐 다른 온갖 목숨들은 이롭게 해주되 해로움을 주지 않는 천도를 따라 살아갈 뿐이다. 


-제 맘대로 삶을 누리게 내버려두라
聖人之道(성인지도라)

聖人之道爲而不爭(성인지도위이부쟁)

성인의 도는 위하되 겨루지 않는다.<노자 81장 참조>

『노자』에 나오는 성인은 『논어』의 성인이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성인은 인의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해해서 그 이상 더 지극할 수 없는 분을 일러 말한다. 그러나 『노자』의 성인은 그러한 인의를 끊어버리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노자』에 나오는 성인은 누구인가? 자연을 오로지 본받아 포일 하는 분이다.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껴안을 뿐만 아니라 온갖 것을 하나로 껴안는 분을 말한다. 이러한 포일이란 다름 아닌 법자연 즉 자연을 본받음이다. 자연을 본받음이란 무슨 말인가? 이는 대도를 본받기 함이니 그 본받기란 어떤 것인가? 대도는 천지만물을 낳아주되 갖지 않고 위해주되 바라지 않으며 더없는 위임에도 이래라 저래라 않음이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부재하나니 만물을 천방 즉 가두리 없이 산천이나 대해에 마음껏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는 저 대도를 그대로 본받는 분이 곧 『노자』에 나오는 성인이다. 그 성인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사람으로 여기고 우러러본 편이다. 『논어』의 성인은 분명 사람이지만 『노자』에 나오는 성인은 아마도 대도를 의인화한 것으로 마음먹으면 속이 편하다. 『노자』 오천어를 남긴 노담께서 대도를 성인으로 삼아둔 것으로 생각해도 안 될 것은 없다. 오죽했으면 노담께서 절성기지 하라고 단언했겠는가? 백성 앞에 성인이라고 나서는 사람과 절연하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과도 단절하라고 서슴없이 말한 그 심정을 생각할수록 마음속에 와 닿는 사연은 절절해진다. 그러므로 『노자』에 나오는 성인은 사람이 아니라 갚은 산속 어딘지 모를 귀영지에서 쉼 없이 새 물을 솟구치게 하는 옹달샘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산천에 온갖 새들이 깃들어 사는 새둥지 같을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노자』의 성인은 온 사람 온갖 것들을 오로지 도와만 주는 까닭이다. 『노자』의 성인은 결코 보답하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냥 그대로 도와주는 것을 일러 자연이라 한다. 이 천지에서 사람만 주고받고 흥정하면서 살지 사람 이외 온갖 만물은 사람을 도와줄 뿐이다. 목장 울타리 속에서 풀 뜯는 소들은 자연이 아니다. 사람이 돈 받고 팔아치울 상품일 뿐이다. 사람의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자연이 아니다. 강가에 있는 돌멩이는 자연이지만 그 돌을 주어다 담장을 쌓으면 담장에 놓인 돌은 그만 자연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자연은 모든 것들을 천방 해 둔다. 제 맘대로 삶을 누리게 내버려두는 자연을 그대로 본받아 실행하는 분이 『노자』에 나오는 성인인지라 그 성인은 곧 바로 자연을 뜻한다고 여기고 믿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왜냐하면 이즈음 사람들이 부쩍 “자연에 살리라” 외치는 모습들이 마치 “성인께 안겨 살리라”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위해주기만 하는 성인인지라 우리와 겨룰 일은 없다. 자연은 결코 겨루지 않기에 성인도 따라서 겨루지 않는다. 위해 주되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다투지 않는 성인이 목메어 그리운 까닭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눈만 뜨면 씨름판에 올라가 샅바잡기 다툼을 면하기 어려운 삶속으로 떠밀려가고 있는 까닭이다. 누구나 바라는 행복 그것은 솔직히 따지고 보면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일 수 있다. 돈 주고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바라는 행복이란 것은 겨루어서 이긴 승자의 것이 아님을 믿을수록 삶은 그만큼 나아진다. 우리가 『노자』에 나오는 성인을 본받아 그냥 그대로 위해만 주되 서로 다투지 않는다면 행복은 결코 신기루 같지 않을 터이니 『노자』 맨 끝에 <위이부쟁 하라>고 말했지 싶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그동안 하동뉴스는 윤재근 지음의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마운가’를 권하는 책으로 연재해 왔습니다. 이번 호로 끝맺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동뉴스 연재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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